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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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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계뉴스] [최선 박사 칼럼] 스위스 제네바 종교개혁자들을 찾아서 미주교회신보2024.07.17
    종교개혁사를 공부하는 동안 몇 차례에 걸쳐 스위스와 서유럽을 탐방할 기회가 있었다. 특히 16세기 스위스의 제네바, 취리히, 바젤은 프랑스 위그노들이 가톨릭으로부터 정치적, 종교적 억압으로 고통을 겪었다. 종교개혁의 중심지였던 스위스로 프로테스탄트 피난민들과 종교개혁자들이 각국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생명의 진리를 위하여 많은 피를 흘린 그들의 불꽃같은 희생의 정신을 돌아보며 혼란한 시대에 신앙의 교훈을 삼고자한다. 16세기의 유럽은 기독교 천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다양한 발전도 있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박해와 반성경적인 제도로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에서 벗어나 성도들에게 큰 아픔을 가져다주었다. 가톨릭의 극심한 물질적, 윤리적 타락에 맞서서 종교개혁의 등불을 든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해 성경과 믿음을 강조하며 등장하게 되었다.본 글에서는 스위스 제네바 종교개혁자들을 찾아서 종교개혁의 정신적 교훈을 살펴보고자 한다.프랑스 출신이며 개혁교회의 기초를 닦은 존 칼빈이 종교개혁의 선두주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영향은 스위스와 프랑스가 바른 교회 개혁을 위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프랑스 국왕이 위그노들을 박해하자 칼빈은 개신교 도시였던 스위스 제네바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기욤 파렐의 강력한 요청으로 스위스 종교개혁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다.존 칼빈은 종교개혁 2세대로 마틴 루터의 개혁정신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독일의 루터파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신득의 원칙을 매우 중시했다. 그리고 교회와 국가에 복종하며 가톨릭적이며 신학적인 요소를 유연하게 수용하였다.마틴 루터가 온건적 개혁주의였다면, 존 칼빈은 하나님 절대중심으로 절대주권과 원칙을 중시하며 국가와 교회분리를 주장했다. 그는 보다 혁신적이며 엄격한 개혁주의로 경건하고 강력한 신앙을 강조하였음을 인식할 수 있다.심지어 존 칼빈은 십자가 위에 예수의 형상을 달지 못하게 할 정도로 우상숭배에 대하여 매우 엄격했다. 그는 미사를 예배와 설교로 바꾸었다. 칼빈의 영향을 받은 스코틀랜드 출신 존 낙스는 본국으로 돌아가 장로교 목사, 장로, 집사, 교사로 구성된 교회 직제의 기초를 세우며 장로교를 발전시켰다.루터가 주장한 종교개혁의 기본 원칙은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이었다. 칼빈에 의해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합쳐져서 이른바 종교개혁의 5대 강령이 완성이 되었다.칼빈의 종교개혁 동료였던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은 칼빈보다 먼저 프랑스에서 추방을 당하였다. 그는 스위스에서 활동했던 순회 선교사이자 위그노 종교개혁자로 스위스 베른과 제네바를 종교개혁 도시로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칼빈이 제네바에서 활동하도록 주선하였고 개혁교회 설교자로 활동 하였다.칼빈의 후계자였던 테오도르 베자(Theodor Beza, 1519-1605)는 법률학도로서 1548년 심한 질병 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였다. 또한 베자는 제네바와 로잔에서 그리스어를 강의하였고 칼빈이 설립한 제네바 아카데미의 원장이 되었다.그는 프로테스탄트 개혁파를 옹호하였고 제네바 종교지도자인 칼빈의 후계자로서 베자 사본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4세기 말 고대 사본으로 1562년 1차 프랑스 종교전쟁 중에 리용이 약탈되던 중에 베자에게 인계되었고 1581년 캠브리지대학교 도서관에 기증되었다. 베자는 피난과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고통 받았던 프랑스 위그노들의 자문역할을 훌륭하게 담당하였다.존 낙스(John Knox, 1514-1572)는 16세기 영국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로 칼빈의 스코틀랜드교회의 창시자이며 장로교의 선구자였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였지만 제네바에서 칼빈과 교류하면서 개혁주의 교회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존 낙스는 1561년 프랑스에서 귀국한 로마 가톨릭 신자인 여왕 메리스튜어트 1세가 교황 정치로의 회복 시도와 개혁주의 종교개혁을 방해하자 메리 1세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개혁주의 도입을 강력하게 촉구하였다. 1567년 여왕이 퇴위하고 그 아들 제임스 6세가 프로테스탄트 왕으로 즉위함으로서 존 낙스의 종교개혁이 스코틀랜드에서는 크게 인정받게 되었다.중세시대는 점점 종교가 타락해 오히려 반성경적이었으며 평신도는 성경을 읽을 수도 없는 시대였다. 성직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 하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성경이 주장하는 원래의 복음적인 교회로 돌아가자는 신앙운동이었다. 본질과 멀어진 것들을 혁신적으로 개혁하고 수정하자는 개혁정신을 담고 있었다. 교황 중심 주의적인 권위와 인본주의적 발상으로부터 첨가 되고 오염된 의식 등을 제거하고 오직 믿음중심, 성경중심, 은혜중심, 예수중심의 신앙본질로 돌아가는데 오랫동안 피 흘림과 희생이 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마음이 아프다.우리는 가식적인 종교의식과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과 기쁨이 없는 신앙행위를 경계하여야 하겠다. 오늘은 스위스 제네바 종교개혁자들을 살펴보았다.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 기독교 정신이 사회를 정화하고 섬기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오직 생명의 복음을 전하며 크리스천들이 믿음과 삶의 실천을 통해 향기롭고 아름다운 열매가 풍성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최선 박사(Ph.D., Th.D.)세계로부천교회 위임목사삼백만부흥운동본부 총재[삼백만부흥운동본부 총재 최선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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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계뉴스] [최선 칼럼] ‘견미단’ 미래 지도자로 방미 역사 탐방 미주교회신보2024.07.06
    [2024 견미단 발대식 배재학당 역사박물관] 사진제공 최선 박사“견미단은 조선에 선교사가 들어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역사탐방 방미 위해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에서 발대식 가져”   조선은 흥선대원군의 통상 수교 거부 정책으로 고립되었고 세계의 흐름에 눈과 귀를 닫았다. 그 결과로 조선 말기는 통상무역을 하려는 대국들의 압력과 군사적 침략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는 시기를 보내야만 했다.결국 조선은 1882년 조미통상수호조약을 체결하면서 개방의 물꼬를 열었다. 다음해 고종은 민영익을 단장으로 한 사절단을 미국으로 파견하였다. 대표단의 공식 이름은 ‘보빙사절단’, 또 다른 이름 ‘견미단’으로 불렀다.견미단은 1883년 7월, 샌프란시스코에서 기차로 시카고를 경유하여 워싱턴DC, 뉴욕, 보스턴까지의 대장정으로 소방서, 학교, 기업, 행정기관, 미 대통령과 정치인 조우하는 등 미국을 탐방하였다. 이들의 방미는 조선 말기의 개화 과정에 특별한 영향을 미쳤다.미국 볼티모어 기차역에서 하나님의 특별한 섭리가 있었다. 평소에도 동양에 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존 가우처 목사는 견미단을 발견하고 통역을 대동하여 대화를 시도하였다. 이 사건은 그가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응답 되는 순간이었다.당시 미국인들은 조선을 잘 알지 못하고 있었는데 우연한 만남으로 가우처 목사는 ‘은둔의 왕국’ 조선에 입국하는 것과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근대 자유 문명 유입의 물꼬를 여는 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가우처 목사는 일본에 있던 맥클레이 선교사에게 미국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할 수 있는지에 대해 전보를 보냈다. 결국 맥클레이 선교사는 미국에 있는 가우처 목사의 후원으로 조선으로 무사히 입국하였다. 그리고 그는 고종을 만나 미국 의료인과 교육인의 조선 입국을 공식적으로 허락을 받았다.위와 같은 역사적인 과정을 거쳐 드디어 1884년에 호러스 알렌과 1885년 언더우드, 헨리 아펜젤러, 매리 스크랜튼 선교사 등이 조선으로 입국할 수 있게 되었다. 하나님은 견미단의 방미를 통해 동양을 위하여 기도하고 있었던 가우처 목사를 만나게 하셨다. 견미단은 단순히 사절단을 넘어서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 속에서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근대 문물과 자유사상이 조선에 자연스럽게 들어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1883년 견미단의 미국방문을 계기로 조선 선교의 문이 열리게 되었다. 선교사들은 정동에 정착하여 정동제일교회, 근대식 배재학당과 독립신문사 등을 출범시켰다. 그 열매로 기독교 복음과 개화사상을 국민들에게 전파하였다. 이승만 대통령도 정동에 있는 배재학당에서 자유의 개념을 배우며 새로운 나라를 꿈꾸기 시작하였다.2024 견미단의 방미를 위하여 7월 6일 배재학당 역사박물관에서 발대식을 가졌다. 역사탐방은 1776년 미국의 건국 정신이 1948년 대한민국의 건국정신으로 이어지는 독립정신과 우리가 누리는 자유의 뿌리와 기둥을 세워가는 견학이 될 것이다.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근대 한국의 자유와 독립사상이 태동하는 현장을 밟으며 역사의식을 고취할 것이다.이러한 시점에 우리나라 초대 및 건국 이승만 대통령의 국빈 방미 70주년을 기념하면서 역사적인 의미를 되새기고 10대 청소년과 20, 30대 청년 50명이 단장 조평세 박사/1776연구소 대표, 부단장 손영광 교수/바른청년연합 대표와 함께 7월 14일부터 27일까지 역사탐방을 떠난다.주요 탐방지로 하와이에서는 한인기독교회, 오아후 공동묘지, 호놀룰루 한국전쟁 참전용사 기념비, 진주만 기념공원, 애리조나호와 미주리호, 칼리히 초등학교(한인기독학원 터), 마우나리 요양원 등을 방문한다.그리고 보스턴에서는 하버드대학교, 메이플라워호, 플리머스, 필그림파더스 기념탑 또한 뉴욕에서는 컬럼비아대학교, 맨해튼 영웅들의 골짜기 아울러 프린스턴에서는 프린스턴대학교 등을 견학한다.필라델피아에서는 이태산 묘지, 크라이스트처치, 리버티벨, 인디펜던스홀(독립기념관), 리틀시어터 그리고 애나폴리스에서는 메릴랜드 주의회, 워싱턴D.C. 링컨 메모리얼, 한국전쟁기념공원, 아메리칸대학교 이승만 벚꽃나무 등을 찾아 볼 예정이다.우리의 젊은 청년들이 미국의 독립 역사와 우남 이승만 대통령의 독립 외교 및 역사의 흔적을 탐방하면서 자유대한민국 미래의 지도자로 성장하기를 기대한다.[삼백만부흥운동본부 총재 최선 박사]  최선 박사(Ph.D., Th.D.)세계로부천교회 위임목사삼백만부흥운동본부 총재FEBC서울극동방송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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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계뉴스] [최선 박사 칼럼] 역전의 인생, 마부 이자익(李自益) 미주교회신보2024.06.27
    [삼백만부흥운동본부 상임대표 최선 박사] 조선시대 말 무렵 우리나라는 강대국 외세의 압력과 세계적인 식민지 쟁탈로 인한 약소국으로 파행을 걷고 있었다. 국내적인 정치적 혼란과 파당 싸움으로 국민들은 극한 경제적 가난과 불안한 삶을 영위하는 연속이었다. 특히 일본과 청나라 그리고 러시아 대국들의 소용돌이 속에서 현실과 미래가 예측하기 어려운 시기를 보내고 있었다.바로 그 시대에 배고픔을 해결하기 위해 섬마을을 떠난 소년이 있었다. 그가 바로 1879년에 태어난 이자익이다. 7세에 고아가 된 그가 배고픔과 외로움을 달래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은 마을 곁에 있는 냇가로 가서 물을 실컷 마시고 얇은 돌을 멀리 던지며 놀이 삼아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고향을 떠나 떠돌이 생활을 하던 청소년 이자익은 17세가 되던 해에 걸어서 전라도 전주까지 오게 되었다.길거리에서 일을 찾던 그에게 숙식이 가능한 갑부집이 있다는 소문을 따라 도착한 곳이 전북 김제에서 제일가는 금산 지주 조덕삼의 집이었다. 이자익은 주인을 만나 먹고 살 수만 있다면 마부로 채용해 주길 청했다. 후덕하기로 소문났던 지주는 그를 마부로 받아주었다.조덕삼의 아들이 훈장에게 천자문을 배우고 있었다. 방문 밖에서 자익이 엿듣고 있는 것올 본 주인은 방 안으로 그를 불렀다. 두려움에 빠져 있던 자익은 조심스럽게 그의 잘못을 시인하고 앞으로는 조심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주인 조덕삼은 마부를 혼내는 것이 아니라, 천자문을 외울 수 있냐?고 묻는 것이 아닌가? 안심한 자익은 단숨에 천자문을 외웠다. 자익의 총명함을 발견한 주인은 그의 아들과 함께 공부하도록 했다. 자익은 주인의 배려로 한자를 터득할 수 있었다. 조덕삼은 일자무식이었던 그를 지식과 인격을 갖춘 청년으로 성장하도록 도와주었다.어느 날 그곳을 지나가던 (L.B Tate, 테이트) 한국명, 최의덕 선교사가 조덕삼의 집에 머물게 되었다. 왜냐하면 그 저택은 말이 쉼을 가질 수 있는 시설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덕삼은 선교사와의 만남으로 복음을 듣게 되었다. 인생 상담을 받았던 주인은 즉시 사랑방을 내어 주었고 오래 가지 않아 그곳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하였다.점점 교인들이 많아져 집회를 할 곳이 좁아 교회 건축의 필요성이 제기 되었다. 조덕삼은 과수원의 땅을 교회 부지로 하나님께 올려 드렸다. 성도들과 함께 합력하여 ㄱ자 금산교회를 완공하고 하나님께 영광의 입당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당회장인 최의덕 선교사는 교회의 일꾼이 필요하니 세례를 받은 교인들 중에 영수를 세우자 하여 투표가 있었다. 주인 조덕삼과 마부 이자익이 선출이 되어 교회와 교인들을 볼보기 시작하였다. 교회가 안정이 되자 교회의 살림과 선교사를 대신하여 예배 설교를 해야 하는 장로를 선출해야 했다. 장로 선출 투표가 있었다.그런데 교회건축에 헌신한 지주 조덕삼은 떨어지고 그의 하인인 마부 이자익이 장로로 선출되었다. 교인들이 술렁이기 시작하였다. 바로 그 때, 조덕삼 영수는 “나보다 더 신앙이 좋고 교회를 이끌어 갈 이자익 장로님을 우리가 잘 섬기며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세워 갑시다” 라며 성도들을 오히려 설득하였다. 양반과 하인의 신분제도가 존재하던 그 시절에 있을 수 없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하나님은 주인 조덕삼을 통해 진정한 섬김의 정신을 실천하게 하였다. 이것은 마치 성육신하신 예수님의 온유와 겸손의 마음을 닮은 것이었다. 교회가 안정이 되면서 교인들이 성장하였고 조덕삼 영수는 후에 장로로 피택 되었다.주인 조덕삼 장로는 마부 출신 이자익 장로를 평양신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생활비 전부와 필요한 모든 학비를 주면서 하나님의 종으로 훈련을 받게 하였다. 이자익 장로는 한일합방이 있었던 해에 입학하여 5년 과정을 무사히 마쳤고 1915년 6월에 평양신학교 8회 졸업을 하였고 당당히 목사가 되었다.어린 나이에 고아가 되어 어려움 속에 있었으나 주인의 도움으로 역전의 인생을 한 그는 자신이 신앙생활 하였던 김제 금산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다. 1919년 3.1운동과 6.25 한국전쟁으로 큰 고초를 겪었다. 또한 이자익 목사는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를 오가며 복음을 전했다. 그는 전북노회, 대전노회 등 여러 노회를 설립하는데 공헌을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24년 함경도 함흥에 모인 대한예수교장로회 13회 총회에서 총회장이 되었다. 그리고 1947년 33회, 1948년 34회 총회장을 세 번씩이나 역임하였다. 전국 노회의 총대들에게 신임을 얻었고 가장 어려웠던 일제시대와 6.25 한국전쟁 전후로 한국교회에 지대한 헌신을 하였다.140년 한국교회 역사 가운데 이와 같은 이력을 갖고 있는 목회자가 있을까? 이자익 목사는 목회자, 선교사, 대전신학대학교 설립자인 동시에 미국 남장로교, 북장로교 선교부와 목회자들에게 신망을 받았던 사역자였다. 그의 능력을 인정한 정부에서 체신부 장관 등 입각 제의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겸손하게 거절을 하였고 남은여생을 생명의 복음으로 사람을 살리고 키우는 생명사역에 매진하였다.사람들은 어려운 시절을 겪으면서 실망과 좌절에 빠진다. 더 나아가 원망과 불평이 몸에 배여 있는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이자익 목사는 고아의 신분을 극복하였고 하인 생활에서도 끊임없이 도전하고 배우는 자세로 일관하였다. 그리고 성품과 신앙이 좋은 조덕삼 주인과 함께 하나님 나라를 세우는 사역에 평생을 보냈다. 그는 노회장과 신학교 교장, 그리고 총회장 등을 거치면서도 오직 생명을 살리는 영혼구원에 자신을 드렸다. 끝까지 초심을 잃지 않고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사명을 다한 이자익 목사는 1958년 79세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어느 때 보다 한국교회가 혼란하다. 급기야 사회적, 문화적인 상황 속에서 한국교회 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건강하지 못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격과 신앙이 건강한 크리스천들이 더 많다. 그래서 한국교회는 소망이 있다. 성령과 말씀이 이끄시는 거룩한 공동체로 사역을 감당하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한다.기독교가 지탄을 받고 있는 현실 속에서도 신앙의 선배 이자익 목사와 조덕삼 장로의 아름다운 관계가 한국교회의 소중한 자산으로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우리도 그들을 본받아 어려운 이 시대를 극복해 가는 통찰과 지혜가 있기를 기대한다.인생의 행복은 높은 학벌과 넉넉한 물질을 소유한 이들에게 만 있는 것이 아니다. 이처럼 고아로 자라면서 하인의 신분임에도 포기하지 않고 성실한 삶을 영위하고자 하는 신실한 태도가 행복한 인생으로 만들었다는 사실이다.그러므로 인간은 만남이 중요하다. 자신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실망과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이가 있다면 반드시 기억하자. “사람이 사람을 만나면 역사가 이루어지고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면 기적이 이루어진다” 하나님을 만나면 역전의 인생으로 살아 갈 수 있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말기를 바란다.최선 박사(Ph.D., Th.D.)세계로부천교회 위임목사삼백만부흥운동본부 상임대표한국문인협회 시인작가FEBC서울극동방송 칼럼니스트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ㄱ자 금산교회-사진 제공 최선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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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계뉴스] [최선 칼럼] 대한민국의 선교사 입국 과정 미주교회신보2024.06.11
      [삼백만부흥운동본부 상임대표 최선 박사]   18-19세기의 우리나라는 혼돈에 빠져 있었다. 쇄국정책으로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지 않고 스스로 고립된 상태로 세계정세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었다. 당파싸움이 과열되고 있었으며 외세의 압력으로 좌충우돌하고 있었다.19세기 말의 우리나라는 이처럼 풍전등화와 같은 위기의 순간에 직면하고 있었다. 세계 강국들에 의하여 식민지배가 보편화 되어 있던 시대에 선교사들이 조선에 입국하였다. 사회, 문화, 교육, 의료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기독교 정신은 자유대한민국의 발전에 너무나 큰 발자취를 남겼다.그 역사적인 발걸음을 짧게라도 돌아보는 것은 이 시대를 조명하고 현대를 살아가는 국민들에게 경각심을 주고 크리스천들이 겸손하게 사역의 현장에서 고마움을 가지고 생명의 복음을 전하는 밑거름이 되기를 기대한다.선교사 입국의 흐름들을 간단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에 북 장로교 언더우드 선교사와 감리교 아펜젤러 선교사가 단편이지만 일본에서 조선어로 번역한 성경을 가지고 우리나라에 입국하였다. 뒤를 이어 감리교 스크랜턴 부처와 모친 매리 스크랜턴, 헤론이 입국하였다.호주장로 교회에서는 1889년 10월에 데이비스와 그의 누이가 입국하였다. 그리고 영국 성공회에서는 1890년 코프 감독과 6명의 목사, 그리고 2명의 의사가 조선 땅에서 선교 사업을 시작하였다.미국 남장로교는 1892년 호남지방 선교를 시작으로 테이트 목사, 그의 누이 마티, 데이비스, 평양신학교에서 조직신학을 가르친 이눌서 목사, 전킨 목사가 선교를 진행시켰다.미국 남감리교 선교부는 1896년 리드 목사를 보내었다. 그리고 캐나다 장로교회 출신인 맥켄지 목사는 독립 선교사로 한국에 와서 소래에 거주하면서 서경조(서상륜의 동생이며 후에 장로교 초대 목사가 되었음)의 도움을 받아 소래교회를 신축하였다.후에 캐나다 장로교회는 맥켄지의 죽음을 계기로 1898년에 그리어슨 부처, 푸트 목사 부처, 맥캐어가 함경도에서 선교를 시작하였다.펜윅을 통하여 시작된 침례교의 선교는 1895년 폴링, 게이들린 등이 충청도 공주와 강경에서 활동하였다. 하지만 재정적 어려움으로 중단되자 펜윅이 인계하여 1906년에 ‘대한기독교회’라는 독자적인 조직을 갖추고 선교에 착수하였다.성결교회는 도쿄에서 성서학원을 졸업한 김상준, 정빈이 1907년에 귀국하여 전도하기 시작하였다. 1921년 ‘조선 예수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라고 개칭하고 웨슬리 사상을 따르며 4중복음의 교리를 가졌다.또한 구세군의 선교는 1908년 호가드의 내한으로 시작되었다. 자유교회로 알려진 플리머스 형제단은 1896년부터 시작되었고 노리마츠와 조덕성, 신태일 등과 함께 서울과 경기 지방을 중심으로 전도활동을 펼쳤다.선교사들이 다양한 면에서 조선의 개화와 사회적인 계몽에 기여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정부 인사들은 선교사들을 일정부분 다른 인사들보다 좀 더 신뢰하고 인정했다.그러나 자신의 권력에 대한 보다 큰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하여 전국적으로 자유로운 선교는 유보돼 있었고 전적으로 허락하지는 않았다. 그래서 선교사들은 우회적으로 조심스럽게 트라이앵글 선교정책으로 선회하여 먼저는 학교를 설립하였고 다음으로 병원을 개원하여 국민들과 친숙한 관계를 맺으면서 자연스럽게 교회를 세울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기에 이르렀다.선교초기 목숨을 담보로 우리나라에 입국하여 생명의 그리스도를 전하였던 선교사들의 희생과 노고에 감사를 드린다. 우리는 복음을 받은 후손으로서 지혜로운 선교방법을 채택한 선교사들의 사역에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린다.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였다. 그리고 성령을 보내 주셨다. 제자들에 의하여 세워진 초대교회 이후 지구촌에서 복음을 전하였던 수많은 선교사들이 있었다.물론 한국교회 선교역사 140년의 세월동안 선교사들과 목회자들의 목양일념으로 성령의 열매를 바라보며 묵묵히 달려왔다. 복음의 씨앗을 뿌리는 사역자들의 수고에 성령하나님의 위로와 인도하심을 간구한다.장차 선교 강국으로서 한국교회와 기독교 선교단체가 더욱 발전되어 생명의 복음 예수 그리스도를 땅 끝까지 증거하며 창조의 사명, 복음의 사명, 사랑의 사명을 전하는 탁월한 주의 종들이 되기를 소망한다.  최선 박사(Ph.D., Th.D.)세계로부천교회 위임목사삼백만부흥운동본부 상임대표한국문인협회 시인작가FEBC서울극동방송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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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계뉴스] [최선 칼럼] 순국자들의 애국정신을 기억하자 미주교회신보2024.05.13
      민족과 국가의 수호와 발전에 기여하고 나라와 민족을 사랑한 열사들이 나라를 위해 목숨 바쳐 희생한 모든 이들을 기억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지키는 국가 기념의 날이 현충일이다. 국가의 흥망성쇠로 치닫는 과정에서 개인의 안일과 성공만을 위한 삶이 아니라 애국의 정신으로 목숨을 바친 고귀한 희생은 반드시 국가적 차원에서 존대를 받아야 한다.물론 국민들도 한 마음으로 염원을 담아 그분들에게 최고의 대우를 표현해야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삼백만부흥운동본부는 일제강점기와 해방 전후 그리고 6.25한국전쟁 등 국가의 안위를 위하여 희생한 분들에 대한 감사와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조국의 평화를 위하여 희생하신 고귀한 순국자들의 정신을 기억하자. 자유대한민국의 건국 전 후로 많은 희생이 있었다. 자유를 지키기 위해 전장에서 30만 명 이상이 전사하였고 실종, 부상 등 많은 국가적 아픔이 있었다. 유족들과 후손들은 상처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개인과 가족의 고통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국가적인 아픔을 담고 있다. 따라서 현충일을 맞이하여 희생하신 분들의 애국정신을 반드시 기억하고 후손들에게 이 나라를 물려주자.하나님사랑 나라사랑을 실천하는 국민이 되자.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최고의 피조물이다. 타락한 인류를 향한 아가페의 사랑은 고귀하다. 예수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그 동등 됨을 취하지 않으시고 종의 형체로 십자가의 죽으심으로 복종하셨다. 절대 복종의 마음, 낮아지는 겸손의 마음, 하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희생의 본을 실천하신 정신이었다.나라가 존재하기 위하여 국민과 국토가 있어야 한다. 외세의 침범을 막기 위해 국방력이 강화 되어야 한다. 그 과정에서 개인이 생명을 바쳐 희생한다는 것은 최고의 애국이다. 젊음과 미래의 성공을 뒤로하고 나라를 사랑하여 순국의 길을 걸은 분들의 애국의 실천 정신은 이어져야 한다.가정에서 자녀들에게 나라를 사랑하는 정신을 가르치자. 우리나라가 경제적인 발전과 민주화 되면서 개인주의와 이기심에 길들여져 있다. 근시안적인 역사의식이 아니라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으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진정한 애국정신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가정에서 부터 실천하는 모범을 보이자. 전후세대들은 한국전쟁의 아픔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실정에서 다음세대를 책임지는 부모로서 책무를 감당하기를 기대한다.모든 국민들은 진정한 현충일의 의미를 되새기며 기억하자. 현재의 대한민국의 평화는 공짜로 된 것이 아니다. 문맹이었지만 지혜로웠던 우리의 부모들은 자녀의 내일을 위해 땀 흘려 농사를 짓고, 땅과 소를 팔아 교육을 시켰다. 이처럼 조상들의 희생이 녹아져서 지금의 국력으로 성장할 수 있었다. 그러한 정신이 애국정신으로 이어져 우리의 부모 세대들은 포기하지 않고 내일의 꿈을 향하여 달려왔다.그러므로 자유대한민국의 평화와 안전을 위하여 희생하신 분들을 예우하는 현충일에 국기를 게양하자. 그리고 전국 각처에 있는 국가 유공자가 잠들어 있는 국립묘지를 방문하여 현충일을 의미 있는 날로 지키는 실천을 하자.전장에서 순국하여 아직도 산하에 잠들어 있는 유해를 발굴하여 기리자. 6.25한국전쟁에서 적군과 싸우다가 전사한 유해를 발굴하는 작업을 지속적으로 실행하자. 물론 군차원에서 진행하고 있다. 그러나 세월이 많이 흘러 고령의 유족들의 삶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분들이 살아계실 때 찾아 주는 것이 당연한 것이다. 과학적인 도움을 받아 금년에는 더 많은 유해 발굴로 보훈 가족들의 눈물을 닦아 주는 현충일이 되기를 소망한다.한국교회는 애국의 정신을 가르치고 생명을 존중하자. 교회가 존재하는 것은 나라가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북한과 같은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나라는 종교의 자유가 없다. 하나님을 섬기는 예배와 전도 그리고 선교사역은 건강한 나라가 유지가 될 때 힘을 얻는다. 한국교회는 신앙교육과 애국교육을 같이 하자. 당대와 다음세대에 자유 평화가 이어지는 축복의 나라를 위하여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생명은 무엇보다 소중하다. 국가기념일을 보내면서 국민들은 생명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상기하면서 다시는 전쟁과 국가적인 재난이 없도록 나라의 구성원들은 하나의 마음으로 나라를 사랑하고 생명을 존중히 여기는 풍토가 조성되도록 힘써 실천하자.지구촌의 화약고 이스라엘과 우크라이나의 전쟁 종식과 평화를 위하여 기도하자. 문명이 최고조에 있는 21세기 지구촌 어느 지역에서는 지금도 전쟁으로 고통당하고 있다. 인명과 물적 피해, 가정의 파괴, 그리고 전쟁고아 등 아픔을 겪고 있는 난민들을 국제구호기구 등에서 적극적으로 보살피자. 그리고 하루빨리 전쟁이 종식되고 휴전이 되어 더 이상 선량한 백성들의 생명이 헛되이 죽어가는 사태를 종결하자. 전쟁을 주도하는 국가의 지도자들과 상대국의 국민들이 죽고 죽이는 끔찍한 상황에서 벗어나는 평화의 그 날이 속히 도래하여 쌍방이 잘 살 수 있는 지혜로운 길을 택하기를 기대한다.최선 박사삼백만부흥운동본부 상임대표한국문인협회/한국문학방송 시인작가FEBC극동방송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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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계뉴스] [최선 칼럼] 독서는 인생의 좋은 스승 미주교회신보2024.05.05
    삼백만부흥운동본부 상임대표/시인작가 최선 박사  지구촌 곳곳에서 가정의 달을 맞이하는 소중한 독자들의 부부와 자녀들이 지금보다 더 행복한 삶이되기를 소망한다. 우리는 매서웠던 겨울을 지나 나무의 새순이 돋아나는 봄을 맞이했다. 온통 초록으로 물들인 봄, 인간만의 특혜인 책 읽기가 독자들의 생활에 스며들기를 바란다.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상에 영향을 끼친 사람들의 삶을 면면히 들여다보면 그들은 혼자서 사색하고 기도하며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고 한다. 처칠, 루즈벨트, 링컨과 같은 사람들은 혼자만의 시간으로 큰 유익을 얻었다고 고백했다.나 홀로의 시간은 고독의 시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자신의 일을 추진하는데 참으로 유익하다고 생각한다. 조용히 사색할 수 있는 공간에서 최소한 30분 이상 독서의 시간을 갖는다면 우리의 인생은 한층 달라질 것이라 확신한다.사람들은 독서를 어떻게 하고 있을까? 대부분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압박감을 느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안타깝게도 그 압박감이 더 심해지면 심해질수록 책을 손에 다시 잡기가 두려워하거나 애독이 어려워질 뿐이다.과제로 여겨 일독을 끝내지 못했기 때문에 회피하고 싶은 마음이 커질 수가 있다는 것이다. 읽기로 한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생각은 오히려 독서를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세상에는 엄청나게 많은 책들이 작가들에 의해 지금 이 순간에도 넘쳐나고 있다. 그 중에 읽을 만한 가치가 있는 책, 특히 나에게 더 의미 있는 책은 소수일 것이다.완독에 대한 부담감을 버리지 않는다면 지속적으로 책을 읽을 수가 없다. 독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재미를 유지하는 것이다. 목적을 위한 독서는 한계가 분명하다. 사람은 사실 그렇게 의지가 강하지 못해서 목적만을 위해 행동할 수 없다. 독서에는 재미가 있어야 한다.재미가 있어야 독서도 즐거운 법이다. 자신이 좋아하는 책을 골라 읽을 수 있는 자유, 책 읽기의 즐거움도 있지만 책 읽기의 괴로움도 있을 수 있다. 책을 읽다보면 책은 깊어질 수밖에 없는 것인데 스르륵 읽어내는 책들도 있지만 행간 속을 줄치며 노트 정리하며 그렇게 분석해가며 읽는 책들도 있다.독서는 가볍게 시작했다가 무겁고 단단해지는 것, 그것이 책의 방향이기도 하다. 그러다가 조금 편안하게 책을 선택하기도 한다. 그것은 한 템포 쉼을 주기도 한다. 어디에 메이는 것보다는 즐거워할 수 있는 독서의 행위로 지속된다면 좋겠다. 완독도 좋지만 쉬었다가 다시 잡을 수 있는 그 여유로움, 그때는 또 다시 어렵던 행간이 새롭게 읽혀지기도 하는 기쁨과 행복, 만족이 있는 독서가 될 것이다.책을 읽는 방향과 목적은 여러 가지인 듯하다. 자신에게 맞는 것을 스스로 찾아내야하는 좋은 책은 충분히 인생의 스승이 되어 준다. 특정한 것에 메이다보면 스스로의 굴레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이 독서가 아닌가 싶다.사색하며 자신의 책을 발견해 낸다는 건 큰 기쁨이고 그것이 나를 다스리며 함께 우리와 동행되어진다면 더할 나위 없이 큰 행복일 것이다. 독서는 나의 자아를 즐겁게 해주는 것이라 미소가 흘러나오게 한다. 의무적으로 독서할 이유가 없다.그런 독서는 유익을 주지 못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하는 독서는 시험공부와 다른 것이다. 하지만 책 읽는 좋은 습관을 길들이기 위해서는 당분간은 자신을 혹독하게 훈련할 필요는 있다.필자는 16세기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자 존 녹스를 이해하기 위해 그의 많은 책들을 의무감으로 정독하고 속독을 했었다. 원서를 읽으며 종종 힘들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후에 독서습관이 몸에 배여 이제는 자연스럽게 즐기는 다양한 독서가 가능해졌다.대한민국 국민들 중에 일 년에 책 한 권을 읽는 사람이 적다는 말들을 한다. "한 권의 책은 나의 충실한 친구이다."라는 말이 있듯이 즐기는 독서가 되기 위해 책 읽는 습관을 길들이는 것은 의미 있는 인생을 만들어 갈 수 있다.그렇다면 오늘부터 우리 모두가 책과 함께 보리밭 사잇길로 사색하는 마음의 여유로 녹색의 싱그러운 봄을 즐기며 최고의 멋진 내일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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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계뉴스] [최선 칼럼] 안중근 의사의 나라사랑 미주교회신보2024.04.22
    삼백만부흥운동본부 상임대표/시인작가 최선 박사  강대국들에 의한 식민지 확장과 강력한 개방 압력으로 조선은 망국의 길에 있었다. 그 위기를 타개하기 위하여 변화를 주려고 했으나 1897년부터 1910년까지 13년간의 대한제국은 풍전등화와 같은 살얼음판을 걷고 있었다. 그 중심에 태어나 자라고 애국심으로 불탔던 안중근 의사를 다시 한 번 조명해 보면서 자유대한민국이 일본제국으로부터 해방되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통하여 자유국가로 건국되고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한 현실에서 국민들이 가져야 할 나라사랑에 교훈과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독립운동가 안중근은 1879년 9월 2일 황해도 해주읍에서 태어났다. 그는 1884년 갑신정변 실패 후 모함을 받아 서울을 떠나는 부친을 따라 여러 곳으로 방랑하게 되었다. 안중근 의사는 부친의 애국정신의 영향을 받아 어릴 때부터 나라와 민족을 구하려는 큰 뜻을 키웠다. 청년 시절 안중근은 서양의 발달된 문화와 접촉을 하면서 계몽 교육으로 나라를 찾으려고 하였다.1905년에 초대 한국 통감이 된 이토 히로부미는 1907년 정미년에 조약을 맺자 황제를 폐하고 조선군대를 해산시켰다. 북간도로 들어가 의거를 일으킬 것을 결심한 안중근은 가족들과 이별하고 용정의 명동에 자리를 잡고 무예를 익혔다.그러나 여기서도 의병양성이 어렵게 되자 다시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으로 갔다. 이곳에서 반일 의병장 이범윤을 만나 함께 창의회 이름으로 30만원의 군자금을 모으고 수많은 청년들을 모집하여 연추지방에서 1908년부터 군사훈련을 진행하였다. 안중근은 의병대장 전제덕 부대의 우군령장을 맡고 경홍의 고간원과 회령의 신간원 등지에서 일본군을 습격하였다.하지만 그해 7월, 신간원 전투에서 큰 손실을 보아 부대는 궤멸되었다. 그래도 의지를 꺾지 않은 안중근은 1909년 봄, 조선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와 을사 5적을 처단키로 맹세했다. 7인 단지동맹을 맺고 손가락을 잘라 혈서를 쓰며 독립을 쟁취하고야 말겠다는 굳은 결심을 하였다.1909년 10월 26일 아침 일찍 하얼빈역 대합실에서 긴장한 마음을 달래며 대기하고 있던 우덕순이 성사할 기회를 놓치자 자기 외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할 사람이 없음을 실감한 안중근의 마음은 무거웠다. 거사를 실행하기 위해 신한촌에서 땀 흘려 준비한 일, 손가락을 자르며 맹세하던 일들이 눈앞에 선명하게 떠올랐다.오전 9시에 오래전부터 사진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를 기억한 안중근은 그의 등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총소리가 하얼빈역에 울려 퍼졌다.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안중근은 태연하게 품속에서 간직했던 태극기를 펼쳐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안중근은 로씨야 헌병에게 체포되어 일본사령관에 인계되었고 여순 감옥에 감금되어 갖은 악형과 심문을 받았다.안중근 의사의 거사는 전국 방방곡곡은 물론 세계에 널리 퍼졌다. 1910년 4월 16일 영국신문에서 세계적인 재판의 승리자는 안중근이었다. 그는 영웅의 월계관을 거머쥔 채 자랑스럽게 법정을 떠났다. 그의 입을 통해 이토 히로부미는 한낱 파렴치한 독재자로 전략했다고 보도했다.중화민국을 창립한 존중산은 “안중근의 공적이 삼한과 만국을 돕고 백세와 춘추에 빛나리라”고 했고 1931년에 일본에서도 ‘안중근 의사’란 연극 공연이 있었다. 전 흑룡강성의 장수 천레이는 “안중근은 내 맘속에 애국열정의 불을 지펴주었다. 내가 항일혁명투쟁에 나선 계기는 안중근을 숭배하고 따라 배우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했다.1910년 3월 26일 오전 10시 15분에 안중근 의사는 나라의 독립을 기도하며 조용히 죽음을 맞았다. 그는 최후로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내가 죽은 뒤 나의 뼈를 하얼빈공원 곁에 묻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 되거든 고국으로 가져다 안장해 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각각 모두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이 된 의무를 다하며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안중근은 32살의 젊은 나이로 민족독립의 성스러운 싸움에 생명을 바쳤다.대한제국이 제 구실을 다하지 못한 상태에서 국권이 박탈당하고 급기야 일본제국에 의하여 한일합방으로 쓰라린 망국의 길에서 일본군과 투쟁하며 목숨을 다해 헌신하신 애국자들의 나라사랑을 배우자. 멀지 않아 남과 북이 평화통일이 되는 그날에 한민족의 동포들이 얼싸안고 기뻐하며 살아갈 그 날이 한 걸음 더 가까이 왔음을 기억하고 오늘과 내일도 자유대한민국 우리나라를 사랑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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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계뉴스] [삼백만부흥운동본부 논평] 총선과 역사적인 중요성 미주교회신보2024.04.05
     삼백만부흥운동본부 상임대표/시인작가 최선 박사대한민국 제22대 국회의원을 뽑는 선거가 재외국민과 국내 국민들은 사전투표 선거로 시작하여 전국적으로 본 투표가 진행된다. 자유대한민국에서 투표하는 국민이 진정한 애국자이며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반드시 참여해야 할 것이다.무엇보다 입법부가 건강하려면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의원은 나라의 정치 발전을 위하여 희생하고 섬기는 헌신의 봉사정신이 있어야 한다. 애국심이 강하며 분명한 국가관을 가진 능력 있는 자가 당선되어야 한다. 국가지도자의 자질을 갖춘 인물이 선출되어야 4년 동안 국민을 섬기는 진정한 국회의원으로서 임무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이처럼 중요한 가치를 가지고 있는 총선과 시대적인 국가의 긴급함을 인식하면서 삼백만운동본부(상임대표 최선 박사)는 다음과 같이 국민들과 함께 진지하게 생각하며 바른 행동으로 나아가자.   1. 정치적인 안정과 견고한 자유대한민국을 위해 바른 선택을 하라.이제 선거가 끝나면 우리나라의 방향이 어디로 가는지가 결정이 난다. 혼돈으로 치닫게 될지, 아니면 안정과 견고한 자유대한민국을 세워갈 것인지는 지켜보아야 한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의 꽃이라고 하는 선거에서 국민이 주인이라는 것을 분명히 확인해 주면서 참여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이번 22대 총선은 참여, 공정, 화합을 위하여 한 표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어느 때보다 공정하고 누구나 인정할 수 있는 아름다운 선거가 되어야 하겠다. 그렇게 되어야 행복한 대한민국을 만드는 밑거름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만 한다.   2. 국민들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행동하라.지역구 혹은 비례대표로 그리고 여러 위성 정당들이 공약을 앞세워 자신들을 선택해달라며 호소하고 있다. 이러한 중차대한 위기의 순간에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애국하는 국민들은 주인의식을 가지고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고 행동으로 주권을 준수해야 한다.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지역의 발전과 정쟁에 관한 뜨거움은 계속 될 것이다.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가 끝나면 어떠한 결과가 나왔든지 간에 국민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여 그들은 국민화합을 위해 앞장 서야 할 것이다.   3. 전쟁 중 해외에 있는 자국민들의 안전과 우리나라에 미칠 악재를 사전에 차단하라.지구촌 한편에서 아직까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진행 중이다. 이스라엘이 하마스 그리고 레바논과 시리아 이라크, 이란의 무장 군들과 전쟁을 하고 있다. 대만에는 대지진으로 거대한 피해를 보았고 사회적으로 국민들이 고통 중에 있다. 이를 위하여 도울 수 있는 방안들을 모색하고 국가와 민간인 차원에서 직간접으로 협력해야 할 것이다.이러한 국제 정세를 감안하여 외교적인 밀접한 소통을 가지고 해외에 있는 자국민들의 안전과 우리나라에 미칠 악재를 사전에 차단하는 조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그 외의 세계에도 헤아릴 수 없는 고통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다.지구촌에 평화를 위협하는 각국에서는 전쟁 중지와 철군을 염원하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중동과 나토군 개입과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대폭적인 포격을 가하고 있으며 양측의 교전으로 국가 시설과 선량한 백성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4. 다양한 시대 속 강대국들의 열강들의 외교, 국방, 정치적인 강화를 통해 대처하라.세계 역사에는 19세말과 20세기를 거치면서 세계열강들이 약소국들에게 정치, 경제, 문화, 외교, 종교 등의 이유를 내세워 식민지 확장에 열을 올렸다. 우리나라도 일제치하에서 36년의 국권 상실의 아픔을 잊지 않고 있다.특히 일제강점기 기간 동안은 말로 표현 못할 끔찍한 찬탈이 있었으며 말과 행동을 자유롭게 할 수 없는 생활의 연속이었다. 남녀노소를 불분하고 강제노동과 최소한의 인권은 말살된 채 태평양전쟁의 총알받이로 징집되는 큰 아픔을 겪게 되었다. 심지어 일본 총독부에서는 우리나라의 고유문화 풍습을 왜곡하고 창경궁을 창경원으로 만들었고 한글사용을 금했으며, 일본어를 배우게 하는 등의 문화 말살의 정책을 강력하게 감행했다.   5. 건국 자유대한민국의 가치와 헌법정신을 바로 세워 공산화와 사회주의를 막아라.건국 당시 자유민주주의와 공산주의 간의 치열한 싸움이 있었다. 그러나 다수의 국민들은 북한과 다른 자유민주의를 선택함으로 지금의 번영을 가져 올 수 있었다. 대한민국 헌법정신을 사수하고 진정한 자본경제체계, 평화통일이 오기까지 한미동맹을 지속적으로 펼쳐 가야만 할 것이다.미국, 소련이 중심이 된 2차 대전은 연합군의 승리로 말미암아 일본 천황은 두 손 들고 패배를 선언을 했으며 우리나라는 자력이 아닌 외세의 힘으로 1945년 8월 15일 자유를 얻게 되었다. 안타깝게도 해방되기 전부터 좌우익 이념의 싸움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이러한 국제 정세의 변화는 러시아 붉은 혁명, 중국의 공산화 등 동남아시아가 사회주의로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 동시에 사회 곳곳에 좌익 이념을 갖고 있던 인사들이 다양한 계층에 들어가 국민들은 신음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나 우리 조부모, 부모세대들의 인내, 근면과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은 세계경제 대국으로 발전하였다.   6. 사회적인 전반과 후대에게도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흐르게 하라.대한민국 사회가 현재 겪고 있는 위기와 관련해서 역사적인 각종 사건들이 시사하는 바가 매우 크다고 할 수 있다. 우리나라는 일제강점기와 6.25한국전쟁으로 전국토가 황폐화 되었고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였다. 70여년 만에 경제부국을 이루었다. 원조를 받던 나라가 원조를 하는 나라로 발전한 사례는 역사적으로 찾아보기 힘들지만 우리는 해내었다.이렇게 저력 있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22대 국회의원 선거를 통하여 더욱 나라를 굳건히 세우고 민의를 대변하여 건강한 사회가 만들어 지기를 희망한다. 모든 국민들이 건설하는 대역사를 이루기 위하여 나라사랑과 이웃사랑으로 우리 사회 전반과 후대에게도 공법을 물같이 정의를 하수 같이 흐르게 하자. 바라기는 금번 총선을 통하여 바른 정치가 형성되고 헌법 가치에 맞는 국가관을 지니고 지역생활에서 겸손히 낮은 자세로 성숙하고 분별력 넘치는 정치지도자와 국민들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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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계뉴스] 샬롬나비, 제54회 월례포럼 미주교회신보2024.03.31
    주제발표는 기독교학술원장이며 숭실대 명예교수 김영한 샬롬나비 상임대표가 맡았다. (사진) 동산교회 포럼 “대한민국과 한국교회 - 기독교 민족주의"월례포럼은 동산교회 주일 저녁 예배에 동산교회 성도들이 함께 하였으며 강연에 앞서 한국교회와 복음화를 위하여(곽혜원 박사 경기대 초빙교수), 한국사회와 안정을 위하여(배선영 목사, 송파가나교회 담임목사), 세계선교와 난민을 위하여(권요한 목사, 서울대 학원선교사)를 위하여 기도하는 시간도 가졌다.   김영한 대표는 주제발표에서 유대교 민족주의는 유대인의 남은 자들의 애국정신에서 나온 것이고, 모세와 에스더, 느헤미아, 다니엘 세 청년 등이 대표였으며 기독교 민족주의는 사도 바울에게서 찾아 볼 수 있다고 하였다.성경적 신앙은 각 나라에 있어서 그 민족에게 공동체를 세우는 방향으로 응집력이 되었는데 우리 대한민국도 대한제국이 망한 후에 기독교 애국지사들(이승만, 안창호, 전덕기, 이승훈, 이동녕, 김구 등)이 3.1정신의 계승으로 상해에서 세운 임시정부의 헌장에 기독교 나라, 자유민주공화국 정신으로 세워진 것이라고 강조하였다.   이번 월례포럼은 대한민국이 이승만의 기독교적 정신으로 건국되었고, 3.1운동을 주도한 애국자들이 역시 이승훈, 신석구, 길선주, 김마리아 등 기독교 지도자들이며, 임시정부의 헌장에도 기독교 정신 잘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대한민국 탄생에 미친 기독교의 영향력을 상기하며 오늘날 한국교회의 역할을 강조하며서 다시한번 기독교인들의 자부심과 책임을 깨닫게 하는 귀한 은혜의 시간이었다.   월례포럼에 앞서 개최된 3월 이사회에서는 제55회 월례포럼, 상반기 사랑의 쌀 나누기 행사, 제28회 학술대회, 상반기 워크샵 개최 등 2024년 상반기 사업에 대하여 논의하였다.강사 샬롬나비(상임대표 김영한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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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계뉴스] 샬롬나비 부활절 논평 "생명 포기를 넘어 생명 희망으로" 미주교회신보2024.03.28
    사진(샬롬나비 상임대표 김영한 박사)<2024년 부활절 논평>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상임대표 김영한 박사)은 2024년 부활절 다음과 같이 논평을 발표했다. 2024년 3월 마지막 주일은 인류와 모든 생명의 구원을 위해 이 땅에 오신 성자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경험하시고 다시 살아나심을 기념하는 부활절이다. 2000번 가까운 부활절의 반복에도 불구하고, 역사적으로 인류는 여전히 폭력과 전쟁을 범하고 있으며, 오늘날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을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는 죽음의 공포가 상존하고 있다.대한민국 역시 아직도 북한과 휴전 상태에 있을 뿐만 아니라,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겪음으로써 삶을 포기하는 죽음의 불안을 경험하고 있다. 즉,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죽음의 쏘는 것”(고전 15:55)에 두려워 떨고 있다.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가장 절망적일 때에, 다시 말해 모든 것들이 사라지고 모든 것이 불가능해져 버렸던 절망의 시간에 시작되었다. 예수님 옆에 매달렸던 행악자 중 한 명은 죽음의 극단적 절망 앞에서 예수님을 구주(救主)로 고백했을 때 낙원을 약속받았다(눅 23장). 그 어떤 희망도 남지 않은 무덤에 죽음을 각오하고 찾아갔던 여인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번째 증인이 되었다(마 28장).하나님의 창조의 빛은 가장 어두운 곳에서 시작되었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희망이 사라졌던 예수님의 죽음 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러한 부활 희망을 통해 이제 샬롬나비는 가장 절망스러운 우리 시대의 문제를 진단하고 거기로부터 하나님께서 주시는 은혜를 희망해야 한다고 다음과 같이 천명하고자 한다. 1.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는 이 사실에 우리 삶과 실존이 기초하고 있음을 천명한다.성령의 인도하심을 받지 못한 세속인들이나, 그리스도인이라 고백하지만 자유주의 신앙에 가까운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이 역사적 사실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은 인간의 이성이나 경험만을 기준으로 삼아, 자연의 질서가 하나님의 능력보다 더 확실하며, 그렇기에 죽은 자들이 결코 육체적으로 다시 살아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는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절대화하는 인간중심주의적 한계를 지닌다.분명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빈무덤이 사실이었음을 밝힌다. 당시 사람들은 올바른 사실은 아니었을지라도 최소한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이 비어있었다는 사실을 두루 알고 있었다(마 28:11~15). 나아가 복음서 기자들은 자신들의 정직함 때문에 이 빈무덤의 첫 번째 증인들이 여성임을 숨기지 않았다. 만약 복음서 기자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거짓이라고 강하게 입증하고 싶었다면, 오히려 약점이 많은 당시의 빈무덤 소문과 여성의 첫 번째 부활증언을 밝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 기자들은 빈무덤 소문과 당시 증인으로 인정받기 힘들었던 여성들의 증언을 묵묵히 기술하고 있다. 왜냐하면 이것이 당시의 그들에게는 너무 당연하고 너무 잘 알려져 있기에 결코 숨기거나 왜곡할 수 없었던 사실들이었기 때문이다.부활의 역사적 사실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빈무덤과 최소한 제자들이 그것을 직접 목도했다는 분명한 사실로부터 시작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더 이상 무덤에 계시지 않았고, 그와 관련된 사건을 제자들이 목도했다는 사실은 역사적이다. 이것은 부활사건이 단순한 믿음의 차원을 넘어 사실의 차원으로부터 시작되었음을 알게 해준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과 삶의 허무를 극복하는 사건이다.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한 몸의 살아남을 넘어 죽음 자체가 더 이상 우리를 허무로 돌릴 수 없음을 드러내는 사건이며 삶을 위협하는 허무 극복의 사건이다. 예수님이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요 8:51). 말씀하신 것처럼, 십자가를 따르는 우리를 죽음은 더 이상 지배하지 못한다.복음서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는 그 오심 자체가 세상의 종말이며(막 1:15), 그분의 오심을 통해 자연의 질서는 전적으로 다른 방식으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타락한 인간의 이성과 경험이 이해할 수 없는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를 의미한다.타락한 이 세상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질서는 생명이 있는 자들은 반드시 모두 죽어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이다(창 3:19).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통해 시작된 종말은 바로 이러한 첫 번째 질서를 깨어 부수고 새로운 희망을 선포하였다. 하나님의 나라에서 모든 인간은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통해 죽지 않으며, 또한 죽어도 다시 살아난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바로 이러한 하나님 나라를 가장 먼저 선취한 사건이다. 이제 죽음이 우리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 종말이 완성되지 않았기에 ‘아직-아님’이지만, 이 죽음의 끝남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이미’ 우리의 삶 안에 들어와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원을 통해 죽음을 경험하지 않을 수 있으며, 예수께서 재림하시기 전에 죽은 자들은 다시 깨어나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한다. 그리고 이를 통해 모든 인류는 삶의 허무함을 극복하고 새로운 희망으로 나아갈 수 있게 되었다.죽음, 고통, 노화, 나약함 등 인류의 부정성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희망을 통해 극복되며, 더 이상 이것들은 우리에게 허무함을 줄 수 없다. 우리의 모든 부정성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부터 멸절(滅絶)되기 시작했으며, 그분께서 다시 오실 때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서 그 어떤 허무함도 없는 삶을 영위할 것을 희망한다. 3. 자살률 1위 대한민국은 예수님의 부활 신앙을 통해 생명의 포기를 넘어 생명의 희망으로 나아가야 한다.대한민국은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의 오명을 안고 있다. 그리고 그 어느 때보다 안락사 등 또 다른 형태의 자살을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 팽배해지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죽음의 극복이고 허무에 대한 승리라면, 이제 우리는 삶의 고통과 무의미함 때문에 스스로 목숨을 버리는 것이 죄 됨을 우리 사회에 일깨워 주어야 한다.포스트모더니즘으로부터 시작된 일련의 사상들은 자신의 생명을 자기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생명은 결코 자기 자신의 능력에 의해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것이 아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창 1:1)는 기독교의 고백은 인간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으며, 나아가 6일째에, 즉 가장 나중 지음받은 창조의 정점(頂點)으로 고백한다. 즉, 6일째에 창조된 인간은 하나님에 의한 수동적 존재자이면서, 동시에 앞서 5일간 창조된 다른 피조물들 이후에야, 그것들의 바탕 위에서야 창조되어 생존할 수 있었던 가장 수동적 존재자이다. 이처럼 우리 마음대로 생명을 얻고 유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면 생명의 포기 역시 우리 마음대로 선택될 수 있는 사항이 아니다.자살이나 안락사가 살인과 다름없는 범죄인 이유는 우리 생명의 수동성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에게 생명을 주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와 더불어 모든 생명을 다시 살리시겠다고 약속하셨다(겔 37장). 모든 죽은 자들 부활의 선취(先取)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기 때문에 우리는 자살의 저주를 넘어 생명의 희망에 이를 수 있다. 우리의 생명이 우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기에 죽음은 우리를 지배할 수 없으며, 우리는 모든 죽음의 공포를 넘어 영생을 희망‘할 수 있으며’, 또한 희망‘해야 한다.’ 4. 인간 욕망에 따른 과학 기술의 발달은 더 많은 생명의 죽음과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우리는 오늘날 그 어느 때보다 환경의 위기와 생태계의 파괴를 경험하고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를 부활의 희망으로 이끌고, 이것은 단연코 우리의 삶과 생명 전체의 갱신을 불러올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현대인들이 부활을 신앙하지 못하는 것은 성령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며, 그렇기에 모든 생각의 기준을 인간의 이성과 경험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즉, 타락한 인류의 인간중심주의는 부활을 믿지 못하며, 그 어떤 부활도 불가능하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이러한 인간중심주의는 자신들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다른 생명을 함부로 죽음으로 내몰고 거기로부터 자신의 안정을 획득하려 한다.예를 들어, 과학의 발달은 인류의 삶을 지켜주는 소중한 항목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중함에도 불구하고, 현대과학의 중심에는 오직 인간의 욕망과 욕구 실현만이 위치했으며, 그렇기에 과학의 발달은 더욱 더 많은 다른 생명의 죽음과 희생을 요구하고 있다. 희생되는 생명은 실험 대상이 되는 실험실의 귀중한 생명들(동식물 등)이다. 5. 예수님의 부활 생명은 하나님 중심의 생명 사상이 인류의 유일한 소망인 것을 선언해준다.죽음과 폭력이 난무하는 지금,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통해 “희망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희망”으로 나아가야 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희망할 수 없는 것에 대한 희망이란 우리의 욕망과 욕정을 통해 나타나는 단순한 기대함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이나 다른 생명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이 중심과 기준이 되는 희망이며, 오직 그분만이 이루어내실 수 있음에 대한 신뢰이다. 그리고 그러할 때에만 역사적 사건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과 삶의 허무를 극복하게 하고, 생명의 포기를 넘어 생명의 희망으로 진입하게 하며, 부활의 사건이 인간을 넘어 전체 생명으로까지 확장되게 할 것이다. 6. 예수님의 부활 신앙을 통해서 생명의 희망은 온 지구상의 생명체에 확장되어야 한다.과학뿐만 아니라 우리의 삶 전체의 중심과 기준에 인간이 아닌 하나님이 계셔주신다면, 그리고 그 하나님과 더불어 그분이 모든 피조물이 중심이 되어준다면, 환경과 생태계 절멸의 위기는 사라질 것이다. 그리고 우리 삶의 모든 중심과 기준에 하나님이 위치하신다면,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단순한 신앙의 항목을 넘어 우리가 희망하고 경험할 수 있는 사실로 인정될 수 있다.인간의 타락 때문에, 인간의 자기중심성 때문에 “피조물은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다(롬 8:22).”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과 부활은 이제 인류의 구원과 부활을 넘어 지구촌 전체 생명으로까지 확장되어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실현하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따라 나를 내어주고 다른 생명을 살리는 삶을 살아야 한다. 부활과 생명의 희망은 이제 우리에게 지구촌의 전체 생명을 보존하는 삶을 요구한다. 2024년 3월 29일샬롬을 꿈꾸는 나비행동 일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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