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코너

본문 바로가기
?>

전문가코너

  • 0
    [학술] 공지 띄어쓰기와 표준어 미주교회신보2025.09.23
    ‘띄어쓰기’와 ‘표준어’중부대학교      한국어학과명예교수(본사주필) 최태호   오늘은 상당히 귀한 자료를 얻었다. 우리나라 최초로 띄어쓰기를 적용한 문법책이다. 이 책이 나오지 전에는 한문을 기본으로 사용하던 터라 한글도 띄어쓰기를 하지 않았다. 흔히 한국어 띄어쓰기는 호머 헐버트(1863 ~1949)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알고 있다. 실제로 대중화에 노력하고 성공한 사람은 헐버트가 맞다. 독립신문(1896년 4월 7일 창간과 더불어 띄어쓰기 적용)에 띄어쓰기를 적용할 것을 적극 권장하였고, 편집에도 참여하였다. 그러므로 한국어 띄어쓰기를 처음 대중화하여 문법적으로 적용한 것은 헐버트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헐버트보다 19년 앞서 한국어에 띄어쓰기를 적용한 사람이 있다. 그의 이름은 존 로스(John Ross, 중국이름 나요한, 1842 ~ 1915)이다. 중국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최초로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한 사람이다. 그는 그의 책 <조선어 첫걸음 COREAN PRIMER, 1877>에서 띄어쓰기를 처음 시도하였다. 그는 한국에서 온 무역상들과 만나면서 신약성경을 한국어로 번역하기로 마음먹고, 1887년 <신약전서>를 완성하여 한국에 보냈다. 존 로스는 1874년 가을에 고려문(중국 소재 고려인 집단거주지)을 방문하면서 한국인의 모습을 처음 보게 되었고, 한국을 선교지로 생각하게 된다. 그의 활동으로는 성서 한글화 작업, 서간도를 비롯한 한인촌에 복음전도 등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한반도 이남 등에도 영향력을 끼쳤다. 존 로스가 성서를 한글로 번역하였던 당시 “한자는 진서로 일컬어지며 높은 가치를 인정받았고 한글은 언문이라 불리며 천시되었으며, 한글은 한자의 보조 표기 수단 정도로 인식”되었던 시기였다. 중요한 것은 한국어의 띄어쓰기를 적용하여 한국어의 현대화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지만, 그의 업적이 드러난 것은 요즘의 일이다. 그 이유는 그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사람이 평안도 지방 출신이었던 탓으로 표준어를 구사하지 못하고 평안도 사투리로 한국어 공부책을 발행한 것이다. 예를 들면 로버트 할리라는 연예인이 경상도 방언을 유창하게 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볼 수 있다. 참고로 그의 <조선어 첫걸음>에 나타난 문장을 몇 개 보기로 하자.   내 문에 나가갓슴메 ne moone naghaghassumme I door want to pass(=travel).   어디 가갓슴마 udi gaghassumma Whither journey!   등과 같다. 온통 사투리뿐이라 현대인은 무슨 말인지 모를 수도 있다. 실제로 그의 <조선어 첫걸음>에는 남한 사람들은 알 수 없는 단어들이 많다. 예를 들면 “너는 챠타구 나는 말타구 갑세.”, “사자는 챠뒤여 얼그시.”, “쇼ㅣ쇼한 물건는 챠 안에 두시.” 등이다. 현대 표준어로 한다면 “너는 차 타고 나는 말 타고 갑시다.”, “상자는 차 뒤에 둡시다.”, “작은 물건은 차 안에 두시오.”라고 써야 한다. <조선어 첫걸음>을 손에 쥐고 참으로 가슴이 뛰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한국어 교본>을 얻었으니 감개무량함을 이루 표현할 수 없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책의 가치에 비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당시에는 표준어의 개념도 없었으니 평안도 사투리로 번역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이 없으나 항상 어느 시대나 통용되는 규칙이 있다. 신라시대는 경주방언이 표준어였고, 고려시대는 개성 방언이 표준어였으며, 조선시대에는 한양말이 표준어라고 봐야 한다. 임금이 사는 곳의 언어를 중심으로 하기 때문이다. 존 로스가 번역한 성서가 나중에는 호칭의 문제나 표기의 문제 등으로 다시 번역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었고, 이러한 필요성 때문에 1887년 2월 7일 서울에서 한국어 성서번역위원회(Committee for Translating the Bible into the Korean Language)를 조직하였다. 학문적 가치를 높이 인정받아야 마땅하지만 평안도 방언을 배운 까닭에 후대에 크게 부각되지 못한 것이 자못 안타깝다. 띄어쓰기를 처음 적용한 것에 대해서는 수 만 번 박수를 보내도 아깝지 않다.
    Read More
  • [목회]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 미주교회신보2026.09.09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김순목 장로(계룡대 본부교회)   6월은 군인에게 의미 있는 달입니다. 이은상 시인의 글 중에서 ‘그대 왜 거기에 섰나’, ‘내 생명 조국과 함께 하려고’라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작년에 초빙강의에서 ‘관점을 디자인 하라’라는 책을 쓰신 방용우PHY대표는 군인이란 ‘대한민국의 자존심을 지키는 사람’이라고 정의했습니다. 군인으로서 또군에서 하나님의 일꾼으로 길을 걷고 있는 제가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백성들과 하늘과 땅과 바다와 바다 속을 지키는 대한민국의 자존심이 되겠다.”고 다짐해 봅니다.   아들을 잃고 기적이 일어나다   지금부터 제가 끝이 없으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 제 삶 속에서 경험한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저는 늦은 나이에 단기자원으로 군에 입대하였습니다. 그리고 소위임관 2주 후에 5년간 사랑을 키워온 지금의 사랑하는 아내와 결혼을 했습니다. 신혼집은 홍천시동에 있는 단칸방 전셋집이었고 그해 12월에 귀엽고 귀한 아들이 태어났습니다.비록 힘들고 어려운 근무환경이지만 사랑하는 아내와 아들이 있어 행복했었습니다. 그러나 행복도 잠시 태어난 지 8개월된 아들을 병으로 잃었습니다. 저는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이럴 수는 없다고 원망했습니다. 결혼하기 전 제 아내는 4대째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고 저는 독실한 불교 가정에서 자랐습니다. 제가 대학교를 다닐 때 제아내에게 반해 매주일 교회를 쫒아다녔고 결코 두가정이쉽게 결합할수있는환경은아니었지만하나님의은혜로어떠한간섭도 없이 우린 결혼할 수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순조롭고 감사하던 터라 우리 가정에 닥친 이큰시련은하나님을 더 원망하고 방탕한 생활에 빠지게 했습니다. 그러던 중 마음을 정리하고자 동해안으로 휴가를 떠났는데 복귀하는 길에 영동고속도로 평창휴게소 부분에서 중앙선을 침범한 차량이 우리 차를 정면으로 충돌했고 우리를 뒤따르던 버스가 후미를 받았습니다. 차는 폐차될 정도로 심하게 망가졌고 아내와 저는 크게 다쳤을것이라 생각했는지 사람들이 접근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내와 저는 다치지 않았고 문을 부수고 스스로 나왔습니다. 이때 믿음이약했던제게하나님의 말씀이떠올랐습니다. “이작은자 중의 하나라도 잃은 것은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뜻이 아니니라.” ‘내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나를사랑하셔서나의 등뒤에서 도우셨구나. 하나님께 회개하고 용서해주세요.’라고 고백했습니다.이때 비로소 저는하나님을 인격적으로 만났습니다. 전도의 역군으로 거듭나다   군 생활하면서 진급과 중요보직을 받아 임무를 수행할 때마다 하나님께서 만져주시고 역사하심을 많이 경험했고 사랑하는 아내와 저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주님을 찬양했습니다.특히사랑하는 아내가 기도할때마다 더 확실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소령때, 아내는 제가 하나님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되고 체계적인 신앙교육을 받게 되기를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저는 생각지도 않던 육군대학 교관으로 선발되면서 자운교회에서 전도폭발훈련, TEE, QT, 제자훈련 등 3년이라는 기간 동안 훈련을 받게되었고, 그때부터 하나님은 저를 사용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전도폭발훈련강사, TEE인도자, 신우회 총무, 자운지구 MCF 총무 등 많은 사역을 감당했습니다. 갑자기 부여된 너무 많은 사역에 신용백목사님께 몇가지 사역은 내려놓겠다고 말씀드렸는데 목사님께서 ‘내려놓는 것이 아니라 때려치우는 것이다.’ 라는 말씀에 하나님께서 주신 능력과 은사를 내가 잘나서 가진 것인 양 내어놓으며 칭찬받으려 했던 저의 교만에 회개했습니다. 그리고 충성된 주님의 제자로 사역을 감당할 때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할수있었습니다. CCM 중 ‘난 이렇게 많이 받았는데’라는 찬양이 있습니다. 제가 받은 은혜를 대언하는 것 같았습니다.   교회 건축의 기적   중령으로 진급해서 기계화부대 대대장으로 있을 때 음주를 하지 않는 제게 상급지휘관은 군인이 술을 안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며 핍박했습니다. 그러나 인접부대에서 술로 인한 인명 및 군기사고들이 연이어 발생하였고, 상급지휘관의 마음을 만져주신 주님의 은혜로 연말에 선봉대대 등 부대표창을 7개나 받았습니다. 대령으로 진급하여 연대장을 보직 받아간 부대에서는 교회 부지가 민간기업 소유지였습니다. 교회는 헐렸고 설상가상으로 교회건축을 위해 4억을 기부하겠다던 분들도 개인적인 사유로 취소하였습니다. 기부만 믿고 너무 쉽게 우리의 힘으로 교회를 지을 수 있다고 생각한 우리는 교만했고 하나님께 의지하지 않았으며 기도조차하지 않고 있었습니다. 기부가 무산되고서야 우리는 회개했고 최찬송목사님의 요청으로 특별기도 기간을 정하여 하나님께 기도하고 맡겼을 때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믿음의 지휘관이신 이창효 군단장님과 같이 지구촌교회 담임목사님을 만나 사정을 말하고 목적헌금을 부탁드렸는데 2주 만에 2억 2천만 원이 모금되는등 이때부터 교회를 지을 수 있는 재정이 확보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자랑과 교만을 막기위해 하나님은 제가 떠난 후 교회가 완공되도록 하셨습니다. 결국 주님께 의지하며 기도한 1년 후 우리가 아닌 주님이 교회를 지으셨습니다. 이때부터저의기도는하나님께서사랑하는 아내와 저를 위해 계획하신 그 길에서 우리가 실족하지 않도록 주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붙들어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조카의 사고와 동생가족 구원   교회건축을 위한 기도와 충성을 할 때 제게는 또 다른 시련이 있었습니다. 저는 일란성쌍둥이입니다. 쌍둥이 동생과 저는 합동결혼식을 했고 제 아들과 같은 해 태어난 조카 근효가 있습니다. 근효는 유타주 주립대 의과대 입학허가서를 받고 동생이 군생활 한 곳에 최전방 수호병으로 자원해서 입대했습니다. ‘18.8월경 작전임무 수행 중 간부의 잘못으로 근효의 오른팔이 개방성골절과 동맥절단으로 크게 다쳤습니다. 초동처치를 잘못하여 오른팔에 괴사가 진행되었고 아산병원으로 이원 하여 3개월간 응급실에서 프로포플을 맞으며 마취상태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결국 폐혈증 등을 막기위해 오른팔을 잘랐습니다. 치료기간에도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놀라운 일이 있었습니다. 불교에서 수계까지 받은 동생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가족들. 그러나 ’18.11.12. 반석교회에서 이정우목사님과 박희수목사님 집례로 동생 가정 모두는 세례를 받고 주님의 자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병원에 있을 때 이 가정을 위해 매일 13명의 목사님과 기도제목을 나누었으며, 제가 응급실을 찾아갈때마다 조카의 다친팔과 머리에 손을 올리고 하나님께 기도한후 민수기 6장 24∼26절로 축복해 주었습니다. 이것을 동생이 보고 ‘네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냐’, ‘넌 아들을 잃고도 행복하게 살아가는데 소망이 무엇이냐’고 물어 하나님에 대해 진지하게 전하고 나누는 시간을 가지게 되었고 박희수목사님께 말씀드려 한 달 간의 세례교육을 받은후 세례를 받고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끝없는 사랑에 놀라웠습니다. 근효는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하며 삼촌인 제가 한 것처럼 군인으로서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오른팔 의수를 착용하고 부대로 복귀하여 ‘19.4.27. 병장으로 명예롭게 전역을 하였습니다. 끝없는 하나님의 사랑   지금까지 저는 저를 만나주신 하나님에 대해 극히 일부분만을 글로 옮겨 들려드렸습니다. 제가 시련을 통해 만난 하나님을 간증하고 나누었지만 결국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것만을 주시는 분이심을 고백합니다. 우리의 삶을 통해 보여주신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과 축복에 늘 감사할 뿐입니다. 하나님의 때와 하나님의 방법이 있다는 것을 우리는 삶을 통해 경험했고 그것이 간증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 먼저 제단을 쌓지 않은 이삭에게 하셨던 것처럼 불만족스러운 상황을 주실 수는 있지만 <로마서> 8장의 하나님 말씀처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얻은 우리에게 하나님께서는 좋은 것을 주시고자 하시고 고치시는 주님이십니다. 끝으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일 때 우리를 위해 죽으신 그리스도의 사랑입니다. 세상이 주는 시련에 약해지고 넘어질 때마다 하나님은 가장 좋은 계획과 방법으로 우리를 일으켜 세워주셨습니다. 나를 만나주시고 동행해주신 주님을 모두가 경험할 수 있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Read More
  • [칼럼] 바보 이야기 미주교회신보2026.09.07
    필자는 참 바보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누구에게 싫은 소리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늘 당하고만 살았다. 착한 것과 바보는 다르다. 겉으로 보기에는 착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혼자 속앓이를 한 적이 너무나 많다. 하고 싶은 것은 많았는데, 늘 양보하고 배려한다는 생각으로 본인의 일은 뒷전으로 밀려나 있었다. 일반적으로 바보는 ‘지능이 부족하여 정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을 낮잡아 이르는 말’, 혹은 ‘어리석고 멍청하거나 못난 사람을 욕하거나 비난하여 이르는 말’이다. 그런데 성철 스님이나 김수환 추기경께서는 모두 스스로 바보라고 하고, 김수환 추기경은 자화상을 그려놓고는 거기에 ‘바보야’라고 써 놓았다. 위대한 종교가가 스스로 바보라고 한 것은 자신을 낮추어 표현한 것이지만, 필자의 경우는 세상에 적응하지 못하고 혼자 잘난 척하다가 당하고 마는 진짜 바보다.   은퇴한 지금은 혼자 글 쓰는 시간이 많아서 사람들을 많이 만나지 않지만, 과거에 직장에 다니던 시절에는 무슨 일이 그리 많은지 맨날 사람들 만나고 다녔다. 논문도 써야 했고, 저서도 내야 했다. 여기저기 강연회 쫓아다니면서 잘난 척하고 살아왔다. 그런데 돌아보면 아무도 남아 있지 않다. 대학에 근무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까지 함께 학문을 연구할 것처럼 했지만 은퇴하고 나니 남은 제자도 별로 없다. 많은 사람들이 곁에서 동행할 것처럼 하더니, 남은 것은 “돈 꿔 달라”는 말과, 차용증 없이 꿔 준 탓에 받지 못한 돈이 엄청나게 많은 것뿐이다. 친구들뿐만 아니라 동료 교수들도 가난한 필자에게 잠시만 돈을 융통해 달라고 하고는 아직도 갚지 않은 것이 부지기수다. 필자가 돈을 잘 빌려주게 생긴 모양이다. 돌아보면 그들이 필자보다 훨씬 잘 살았는데, 몇 백만 원 떼어먹고 재벌이 되었는지 궁금하다. 물론 개중에는 미안해서 가끔 전화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꾸어준 돈을 받기는 이미 글렀다. 오호 애재라!   바보는 예전부터 사용해 온 말이다. 어리석고 못난 사람을 일컫는다. 떡보(떡을 잘 먹는 사람), 울보(잘 우는 사람), 잠보(잠을 많이 자는 사람), 늘보(행동이 느리거나 게으른 사람) 등에서 보는 바와 같이 ‘보’는 ‘사람의 뜻을 지닌 말’이다. 그렇다고 뭔가에 정통한 것은 아니고 습관적으로 뭔가를 잘하거나, 지나치게 뭔가에 빠져있는 사람을 지칭한다. 젊은 시절에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중위로 근무하던 친구의 결혼식 사회를 본 적이 있다. 결혼식이 끝나고 사진을 찍는 차례였는데, 필자가 “군바리들 다 나오세요!”라고 했더니 육사를 나온 친구들이 ‘군바리’라고 했다고 투덜거렸다. 우리말에서 ‘바리’라는 말도 사람을 의미한다. ‘부리’, ‘비리’와도 같은 어원을 갖고 있다. 예를 들면 ‘혹부리’, ‘악바리’, ‘학비리’ 등이 그것이다. 요즘 아이들이 고등학생을 ‘고삐리’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런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그렇다면 ‘바보’는 무슨 뜻일까? ‘밥 + 보 = 바보’라고 본다. 즉 ‘밥’의 ‘ㅂ’이 뒤의 ‘보’와 어울려 ‘말음탈락’이 된 것이다. 이것을 다시 풀어본다면 ‘밥만 먹고 일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라고 풀 수 있다. 다른 말로 하면 ‘밥만 축내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많은 성인들이 바보를 추구한 것은 현실의 어려움을 벗어나서 바보처럼 사는 것이 오히려 ‘성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어느 가수의 노래에 ‘바보처럼 살았구려’라는 노래가 있다. 필자가 죽으면 장례식장에서 그 노래를 틀어 달라고 한 적이 있다. 바보처럼 살았지만 남에게 크게 해를 끼친 적은 없다. 그래도 선거판에서는 상대 후부가 필자를 ‘죽일 놈’처럼 표현하기도 했다. 10년을 넘게 면 단위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는데, 부동산 투기하느라 시골 땅을 샀다고 비방한 것이다. 슬픈 현실이다. 이제 바보의 예문을 몇 가지 보고 글을 마치고자 한다.   태호가 바보도 아니고 그런 일을 할 것 같아? 태호는 약간 바보스러워 보이지만 늘 사리에 맞는 말만 했다. 그는 가족도 알아보지 못하고 히죽히죽 웃어 대는 바보가 되어 돌아왔다.   와 같이 쓴다. 바보처럼 사는 것이 좋은지, 바보의 삶이 좋은지 판단은 독자에게 맡긴다.
    Read More
  • [목회] 이의완목사님 103년 생애 축시 미주교회신보2026.04.26
    이의완목사님 103년 생애103세로세월의 강을길게 건너 오신분우리들의 큰 어르신이의완목사님103년 세월하루하루는 주님과 동행한므두셀라의 삶이셨다이만 팔천 동네에 가서우물을 파라교단을 세우신이는김치선목사 시나이를 지키며성장시키신 이는어르신이 아니셨던가대한신학 학장으로수천의 인물을목회자로 길러 내시고 총회장으로교단의 부흥과 발전그 위상을 높이는데헌신하신 지도력은 교단 60년 사에빛나는 족적이시라교육자요 행정가요선교정책가로땅끝까지 이르러증인사명 다한103년 생애는금빛 면류관으로보상하리라여기에칠천 후학이 한 마음으로나성에 모여축하 케익에 불을 붙이니해피 버스데이콩그레츄레이션만수무강 하시라.   2026.4.26. 아침 서울 연희동에서장 태 봉 목사 올림
    Read More
  • [칼럼] 류당열 목사 어머니 고향 방문기 최태호교수2026.03.18
    류당열 목사의 어머니 고향 찾기   류당열 목사의 모친은 명치 삼십년(1897년) 오전 일월 십삼일에 충남 아산군 도고면 신언리에서 출생하였다. 류 목사가 다섯 살 때에 질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집안에는 새엄마가 들어 왔다. 류 목사는 새엄마 밑에서 성장하였고, 안양대학교를 졸업한 후 전도사로 부임하여 쌀 두말을 사례비로 받을 정도로 궁핍한 생활을 하였으나, 이나마도 감사하며 새어머니를 지극정성으로 모셨다. 그 후 그는 장학생으로 미국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류 목사는 미국에 오래 거주하면서 생모에 대한 그리움을 잊을 수 없었고, 드디어 미국에 거주한 지 40년 만에 한국을 찾아 모친의 생가를 찾아보기로 작정하였다. 외할아버지의 성함이 안상철(호적에 의하면 1881년 12월 15일 생)이라는 것과 모친이 도고면에서 출생하셨다는 것만 알고, 2026년 2월 26일 아침 중부대학교 명예교수인 최태호 박사와 함께 길을 떠났다. 조금 이른 시각이라 최 박사가 자주 말씀을 전하던 도고의 ‘목자의 집’에 들러 노춘 장로와 인사를 나누고, 노 장로의 권유로 조반까지 같이 하게 되었다. 노춘 장로가 운영하는 목자의 집은 ‘초교파 은퇴 목회자’를 섬기는 기관이다. 은퇴목회자나 선교사, 홀사모 등이 입소하면 한 달에 30만원만 받고 삼시세끼를 주고, 기도실과 예배실에서 언제든지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아름다운 곳이다. 노춘 장로의 안내로 박정희 전 대통령의 별장을 구경하고, 근처의 온천에서 목욕도 하였다. 점심 식사도 ‘목자의 집’에서 수육을 비롯한 맛난 음식을 ‘선교사 지망생’들과 아름다운 교제를 나누며 해외 선교와 한국어, 해외 선교의 어려움 등에 대해 전임자로서의 경험 등을 알려 주었다. 류 목사의 기도로 본당에서의 행사를 마무리 하고 다시 어머니의 생가를 찾아 도교면사무소로 향했다. 젊은 두 직원이 친절하게 맞아 주어서 과거의 주소와 현재의 바뀐 주소를 알게 되었고, 최 교수의 차량으로 현장 근처까지 순식간에 달려갔다. 도보로 250m 정도 가니 현장을 볼 수가 있었다. 건물은 사라지고, 집터에 석재 공장이 들어서 있었다. 각종 조각물과 정자 등이 주변의 경관과 잘 어우러져 있었다. 신언3리라고 했다. 그곳에서 과거의 어린 시절을 회상하고, 파쇄석이 깔린 마당을 지나 과거의 흔적이 남아 있을 법한 몇 개의 돌을 주어 왔다. 어머니를 기념하고 싶어서 그 돌로 상징을 삼으려는 것이다. 신언3리 마을회관에 들러서 이장과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쉽게도 외조부와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간직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세월이 그렇게 많이 흘러간 것이다. 어렵사리 외조부와 같은 항렬의 사람을 찾았으나, 젊은이라 외조부를 전혀 알지 못했다. 이장(이창재)으로부터 마을의 내력과 마을의 형상(마을의 모습이 복돼지의 형상을 닮았다)에 대한 설명을 듣고, 화합하는 마을의 여러 가지 일들에 관해 설명을 들었다. 비록 어머니의 생가를 볼 수는 없었지만, 생가에서 가지고 온 돌을 통해 생모의 온기를 느낄 수 있었다. 외조부의 제적등본을 받아 오니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이제 부모님의 세대는 완전히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제 후손들이 그 자리를 지키며 나라의 안위를 걱정하는 시절이 되었다. 일제강점기와 한국정쟁을 경험했던 우리들의 어버이시대는 완전히 서산으로 넘어가고, 이제는 우리가 후손들에게 아름다운 미래를 전해주어야 한다.류당열 목사는 그 후 도고제일교회를 찾아서 어머니 이름으로 장학금을 기탁하여 생모의 정을 기념하였고, 논산훈련소에서 진중세례식, 목사안수식 그리고 고향교회 얘배인도 등을 무리없이 스행하고 미국으로 귀국하였다. 꽃은 피어서 예쁘고 열매는 영글어서 오래 간다. 그리고 다시 열매가 썩어야 새로운 꽃을 피게 한다. 더 예쁜 꽃들을 기대하며……
    Read More
  • [칼럼] 류당열 목사님 신년사 미주교회신보2025.12.21
    신년사  다사다난  했던 2025년을 역사속으로 보내고 대망의 2026년 병오년 새해를 맞이하여 열정, 추진력, 활력이 넘치는 한해가 되시길 기도 합니다. 2025년해에 손 흥민 선수의 LAFC(로스앤젤레스 프로 축구단)이적으로 좋은 성과를 거두어 교민 및 한국 국민들에게 기쁨을 선사하고, 베트남 U23이하 국가 대표 축구팀(감독 김 상식)이 태국을 3 : 2로 승리하여 베트남은 전 국민이 축제 분위기 입니다. 영적으로 2026년은 발(Soccer)로 뛰는 한 해가 본인과 타인들에게 기쁨을 안겨 주시길 기원합니다. 1년 365일 [52주, 8,760시간, 525,600분, 42,536,000초] 동안 한 알의 밀알이 되어 많은 열매를 맺는 한해가 되기를 기도 합니다. 사무엘상 25 : "너는 평강 하라. 네 집도 평강하라. 네 소유의 모든 것도 평강하라. 3대 평강이 새해 병오년에 넘쳐 나시기를 기원합니다.                                                          로스앤젤레스 기독교 교회 협의회 회장 류 당열 목사 드림
    Read More
  • [학술] 이단과 사이비 미주교회신보2025.12.19
    ‘이단’과 ‘사이비’의 차이   요즘 종교에 관한 이야기가 자주 뉴스에 나온다. 사실 일반인들이 보기에는 어디까지 이단이고 어느 것이 사이비인지 구별하기가 쉽지 않다. 각종 이단이나 사이비들이 세상에 풍미하고 정치와 어우러져 정치자금 문제로 시끄럽게 하고 있다. 정치인들에게 종교나 돈의 문제는 쉽게 거리를 둘 수 있는 관계가 아니다. 그들이 하는 말로 “거지도 한 표, 대통령도 한 표!”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막대한 돈이 들어가는 선거에 종교 단체에서 은밀하게 정치자금을 대 준다고 하면 자유로울 수 있는 정치인이 얼마나 될까 궁금하다. 이단이나 사이비들은 막대한 자금력을 동원하여 정치인들과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려고 한다. 그래서 유명 정치인들에게 정치 자금을 대주거나 인간 관계를 형성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다. 유명인과 찍은 사진 한 장이 백 명을 만나 전도하는 것보다 효과가 있기 때문이다. 사실 이단을 규정하는 문제는 쉽지 않다. 기독교도 처음 등장했을 때는 유대교로부터 이단이라고 핍박을 받았다. 초기 기독교 안에도 이단으로 규정된 모임이 있어서 그들이 초기 기독교 안에 들어와 불협화음을 내기도 했다. 그래서 오늘은 이단의 개념과 역사를 간단히 알아 보고 사이비 종교의 개념에 대해 살펴보기로 한다.   ‘이단(異端)’이란 무엇인가?   이단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사전적 정의를 먼저 살펴 보자. “정통의 가르침에 어긋나는 교의나 교파를 적대하여 이르는 말”(<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서 인용함)이라고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좀더 확장하여 보면 “이단이란 교회의 공식 교리에 반하는 종교적 생각을 고수하는 것.”, 또, “지배적인 이론이나 의견, 혹은 관습에 반대하거나 거기서 벗어나는 것.”(<메리엄 웹스터 사전>에서 인용함)이라고 정의하였다. 이렇게 보면 이단에는 두 가지의 핵심 요소가 있다. 이단에는 두 가지 핵심 요소가 있습니다. ‘지배적인 입장(정통 교리’)과 ‘그것에 반대하거나 다른 입장(이단)’이다. 그래서 이러한 내용을 정리하면 종교 안에서, 교회의 공식적인 가르침에서 벗어난 믿음이나 행동은 ‘이단’으로 간주한다. 역사 속의 이단을 살펴보면 초기 유대교에서도 기독교를 이단으로 규정하고 핍박하였다. 중세에는 가톨릭에서 종교 재판을 통하여 마녀 사냥을 하기도 했다. 이단은 기독교뿐만 아니라 불교 역사상 처음부터 지금까지 존재해 왔다. 당시 ‘이단’의 기준은 성경이 아니라, 교회 권력의 기준이었다. 즉, 가톨릭 교회가 정한 교리에 동의하지 않으면 ‘이단’으로 불렸던 것이다. 사도행전(24:14)에서 당시 유대인들은 기독교인들을 ‘이단’이라고 불렀다. 즉, 당시 ‘이단’이란 단어는 그 시대의 권력자가 정한 기준에 따라 달라졌다. 교리와 깊은 관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이비란 무엇인가?   사이비의 사전적 정의를 보자. “겉으로는 비슷하나 본질은 완전히 다른 가짜”를 사이비라 한다. 그러므로 사이비란 ‘가짜’라는 단어에 방점을 찍는다. 진짜 같아 보이지만 가짜라는 말이다. 그래서 사이비는 독립적으로 새로운 종교, 신앙 시스템을 형성한다. 이단처럼 뿌리는 같지만 해석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종교처럼 보여도 사실은 종교가 아닌 가짜라고 보면 된다. 이렇게 사전적으로 정의하고는 있지만, 필자의 수준으로도 이단과 사이비를 규정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교리가 다른 것이나, 종교 행세를 하는 가짜들이 너머나 많고, 정통 같아 보이지만 그 속에서도 샤머니즘이나 무속적인 성향을 드러내는 종교인들도 많기 때문이다. 정말 어려운 문제다. 아이고!  
    Read More
  • [칼럼] 섣달 그믐과 설 미주교회신보2025.12.03
    ‘섣달그믐’과 ‘설’중부대학교 한국어학과명예교수 최태호   섣달그믐에 잠을 자면 눈썹이 하얗게 센다고 한다. 원래는 밤새도록 한 해 동안 은혜를 입은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묵은세배를 하는 날이다. 그러므로 잠을 자지 않고 밤새 동네 어른들게 절을 해야 한다. 잠을 자면 어른들이 몰래 밀가루를 발라놓고 눈썹에 셌다고 놀리기도 하였다. 참으로 해학을 아는 민족이다. ‘섣달’은 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달을 이르는 말이다. 옛문헌에는 ‘섯달(원래는 달 자는 아래 아(·)로 표기해야 한다. 향약구급방 하 58)’이라고 표기되어 있으나 지금은 ‘섣달’이 규정 표기이다. 우리 조상들은 섣달을 겨울 중 가장 춥고 긴 달로 여겼다.   ‘그믐’은 ‘그믈>그믈음>그므음>그믐’의 변화과정을 거쳤다. 그믈은 다시 ‘그 + 믈’로 나뉜다. 즉 ‘그’나 ‘믈’은 모두 ‘해’의 의미를 지닌 말이었다. 태양의 운행에 의해 어두워지는 것이 자연의 섭리다. 그래서 ‘어둡다’의 어근인 ‘얻’도 본래는 ‘해’의 뜻을 지니고 있다고 한다.(서정범, <새국어어원사전>)옛문헌을 보면 “그믈뉘를 모른다”, “그 달이 그믈거든”, “그므록하다(죽어가다)” 등으로 나타나 있다. 여기서 ‘그믈다’의 어간은 ‘그믈’이고, 나중에 명사가 되어 ‘그믐’이 되었다. 후에 ‘그믈다’는 ‘어두워지다’의 뜻을 지니게 되었다. 현대어에서 ‘그믐’은 ‘음력으로 그 달의 마지막 날’을 이르는 말이다. 그러므로 섣달그믐은 음력으로 한 해의 마지막 날을 이르게 되었다. 예문으로는   섣달그믐이라 묵은세배꾼이 입원한 문안을 겹쳐서 아침부터 몰려드는 것이다. 그믐으로 접어드는 때라서 별빛이 한결 밝다. 달은 보름을 정점으로 일소하다가 그믐께엔 거의 볼 수가 없다.   한편 ‘설’은 명절로 쇠는 새해의 첫날을 이르는 말이다. ‘설날’이라고도 한다. 즉 ‘정월 초하루’로서 우리나라 4대 명절의 하나이다. 원단(元旦)이라고도 한다. 과거에는 나이를 뜻하는 ‘살’과 ‘설’의 구분이 별로 없었다. 예를 들면 나이를 이르는 것으로 “그 아기 닐굽 설 머거 아비 보라 니거지라(월인천강지곡8 :101)”에서는 ‘설’이 ‘살’(歲)로 쓰인 것이다. 과거에는 살과 설이 구분이 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다가 ‘설’은 원단(元旦)의 듯으로, 살은 나이(歲)의 듯으로 바뀌었다.   우리나라는 언제부터 설날이 시작되었을까? 아주 오래 전에는 동지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래서 사주의 시작인 갑자년 갑자월 갑자일 갑자시는 동지에 비롯되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신라의 기록에 설에 관한 내용이 들어 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라에서는 음력 정월 초하룻날에 왕이 조회를 열고 신하들로부터 새해 축하를 받는 의례를 행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 전통이 고려와 조선을 지나면서 우리 고유의 민속으로 정립되었고, 오늘 우리가 알고 있는 설날 풍습으로 자리 잡았다. 한 때는 양력설로 바꾸려고 했으나, 많은 사람들의 반대로 실패하였다. 그래서 양력설을 신정이라고 하고 음력설을 구정이라고 했다가, 다시 ‘설날’이라고 하게 되었다.   '맞이하여 지내다'라고 할 때는 '쇠다'라고 한다. 그래서 ‘설쇠다’는 ‘새해를 맞이하여 설을 지내다’라는 뜻이다. 우리 속담에 “남의 떡에 설쇤다.”는 말이 있다. “제 일을 남의 힘을 입어서 쉽게 이룬다”는 말이다. 남의 덕택으로 거저 이익을 보게 됨을 비유적으로 이르기도 한다. ‘쇠다’의 예문으로는   우리는 여주로 설쇠러 가요. 설 쇠고 나서 졸업식을 하려고 부랴부랴 떠났다네.   와 같이 쓴다. 많은 사람들이 ‘설을 쇠다(설쇠다)’를 ‘설세다’로 잘못 쓰고 있음을 본다. 이제 설쇠고 상경하는 길이기에 고속국도는 주차장이 되어 있을 것이다. 조금씩 양보하면서 배려한다면 먼 길도 그리 지루하지는 않을 것으로 본다. 명절에 부모님을 찾아뵙는 우리 민족은 참으로 대단한 민족이다. 언젠가는 바뀌겠지만 가능하면 오래 지속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있다.  
    Read More
  • [칼럼] 찐따와 학교 폭력 미주교회신보2025.12.02
    ‘찐따’와 학교 폭력   요즘은 세상이 참으로 이상하게 돌아간다. 과거 필자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시절에는 어깨에 힘을 주고 다니는 녀석들은 있었어도, 그런 아이들로 인하여 학교를 그만두고 싶은 정도까지 이른 적은 없었다. 그런데, 근자에 학교폭력으로 고통받는 아이들이 오히려 더 많아졌다. 필자의 주변에서 벌써 두 달 사이에 한 아이는 자퇴를 했고, 한 아이는 고통스러워하며 상담을 청해 왔다. 둘 다 필자와 잘 아는 아이들이라 걱정이 많다. 참하고 열심히 공부하고자 했고, 발랄한 아이들이었는데, 한 녀석은 벌써 학교를 떠나 검정고시 공부를 하고 있다. 주변에서 왕따를 시키고, 억지로 비밀번호를 알아내서 넷북을 훔쳐보고, 자기들이 보는 이상한(?) 영화를 보지 않는다고 놀림감으로 만들어 버렸다.(참으로 화가 난다. 가해자는 학교에 다니고 피해자가 자퇴해야 하는 현실) 한 아이는 남녀 공학인데, 남자 친구(?)들이 ‘멧돼지, 찐따’라고 하면서 놀린다는 것이다. 이 ‘찐따’라는 말이 아직도 존재한다는 것에 우선 놀랐다. 이 말은 필자가 중학교에 다니던 시절에 소아마비로 한 쪽 발을 저는 친구에게 붙였던 별명이다. 그때는 의미도 모르면서 그렇게 놀렸다. 물론 친구들이 그렇게 부르기 때문에, 필자도 이름 대신 그렇게 지칭한 적이 있다. 찐따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절름발이의 방언’(전라도에서는 절름발이를 ‘찐따’라고 하는 모양이다)이라고 나타나 있다.   필자는 ‘찐따’가 일본어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본다. ‘절름발이, 짝짝이를 뜻하는 일본어인 찐빠(跛ちんば)로부터 유래했다는 설’에 관심이 간다. 필자가 어린 시절에는 일본어의 잔재가 많이 남아 있었다. 그 중 ‘진빠’를 장난스럽게 표현하여 ‘찐따’라고 한 것으로 본다. 과거에는 ‘불량품이나 부분적으로 하자가 있는 물건’을 흔히 '찐빠났다'고 했다. 어른들이 ‘찐빠났다’고 하니 아이들을 그것을 본받아(?) 절름발이를 ‘찐따’라고 했다. ‘찜빠먹었다’는 표현도 많이 있다. 어른들한테 혼나고 와서는 “꼰대한테 찜빠 먹었어.”라고 하는 아이들이 많았다. 뭔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잘못되었다는 의미로 ‘찜빠’라는 말을 써 왔다. 이것도 ‘찐빠’의 변형된 형태가 아닌가 한다. 그래서 소아마비로 장애가 있는 친구들을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나이를 먹고 나니 뭔가 모르게 그 친구에게 엄청 미안한 감이 든다. 같은 반이 아니라 함께 어울리지는 않았지만, 많은 친구들이 그를 ‘찐따’라고 놀렸을 때 엄청 상처를 받았을 것은 자명하다. 이러한 단어가 아직도 살아서 펄펄 뛰어다니는 것이 이상하다.   참으로 이상한 것은 남녀 공학에서 남학생이 여학생에게 ‘멧돼지 찐따’라고 부르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수시로 그렇게 부르면서 놀렸다는 것이다. 키 160cm 정도에 50kg 나가는 아이를 멧돼지라고 부르는 것도 이상하고, 똑똑한 아이들이 모인 특수학교에서 ‘찐따’라로 부를 만큼 어수룩하거나 찌질한 아이가 아니다. 어울리지 못하는 것도 아닌데, 남학생 몇 명이 말되 되지 않는 별명을 붙여서 놀리는 것을 이해할 수가 없다. 결국 이 아이는 정신과 치료를 받으면서 학교 가기 싫다고 소리친다. 참으로 슬픈 현실이다. 아이들의 용어로 ‘찐따’라고 하면 ‘영어로는 Loser’에 해당된다. ‘루저’는 ‘말이나 행동, 외모가 볼품없고 능력과 재력도 부족하여 어디를 가건 대접을 받지 못하는 사람’을 이르는 말이다. 아직 규범 표기는 없다. 필자가 어린 시절에는 ‘찐따’는 주로 소아마비에 걸린 사람을 비하할 때 사용했다.   학교폭력은 사라져야 한다. 요즘 대학교에서는 학교폭력의 전력이 있는 입학지원자에게 불이익을 주는 경우가 많다. 학교폭력 예방법에 의하면 “피해학생의 보호, 가해학생의 선도•교육 및 피해학생과 가해학생 간의 분쟁조정을 통하여 학생의 인권을 보호하고 학생을 건전한 사회구성원으로 육성함을 목적으로 한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현실은 이 법과 전혀 다르다. 가해학생들은 떳떳하게 학교에 다니고, 피해학생은 자퇴를 하거나 정신과 치료를 받으며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학교폭력의 정의에는 ‘따돌림, 사이버 따돌림, 신체•정신 또는 재산상의 피해를 수반하는 행위’라고 되어 있는데, 피해학생이 증거를 모두 갖추어야 하고, 피해학생의 SNS계정을 다 뒤져 보면서 개인정보를 함부로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남자들은 잠재적 성폭력 피의자라는 말이 있다. 여성이 “저 남자가 음휴안 눈으로 봤어요”라고 하면 남자는 성폭행범이 될 수 있다. 남녀 공학에서 남학생이 여학생을 학교에 다니기 싫도록 괴롭혔는데 학교폭력이 아닌가 의문이다. 아직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대학집학을 앞둔 학생들이기 때문에 학교나 교육청에서는 조용히 마무리하길 바라는 눈치다. 한동안 잊었던 ‘찐따’라는 단어를 다시 들음에 감개가 무량한 것이 아니라, 잘못된 현실을 목도하게 되었다. 제발 학교폭력없는 아름다운 사회가 되길 바란다.  
    Read More
  • [교회역사] 이의완 목사님 103세 생일 축하 기도회 미주교회신보2025.12.02
    이의완 목사님 103 생일 축하예배  대신 교단 창설자 중 한 분인 이이완 박사님(전 안양대학교 총장)께서 금년 7월에 102세가 되셨습니다. 103세가 되신 2026년에는 대신 교단 및 재미 안양 대학 총동문회 주관으로 생신 축하 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안양대학교 동문들의 기도를 부탁드립니다.이의완 박사님은 대신 교단과 안양대학을 설립하신 김치선 박사님의 큰사위입니다. 이의완 목사님은 1970년대 중반에 세계선교회 한국지부 지부장 자격으로 경상남도 함양군 유림면에 있는 대궁교회를 지원하기도 하셨습니다. 대궁교회는 그해 10월 군대를 갓 제대한 권학도를 전도인으로 파송하여 시작되었습니다. 1978년 11월 최초 설립 장소가 협소하여 주변의 땅 70평을 매입하여서 교회와 사택을 완공하였고 1979년 10월에는 탁아소 운영을 위하여 건물을 매입하고 1980년부터 운영하기도 하였습니다. 1993년에는 대지 442평을 구입하였고 1997년에 새 예배당을 건축했습니다.이의완 목사님은 청파중앙교회 협동목사, 세계선교전도협회 한국 대표, 대한신학교 교장, 예장 대신 총회장, 대신대학교(현 안양대) 학장 등을 역임하셨습니다. 특히 후학들을 양성하여 전국과 세계 각지에 파송, 교단 발전과 세계 복음화에 크게 공헌하셨습니다.이와 같이 이의완 목사님은 선교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개척에도 큰 기둥이 되셨습니다. 대신 교단 설립과 안양대학교의 설립에 지대한 공헌을 하신 목사님의 업적을 기리고자 Los Angeles 교회 협의회 공동으로 103세 축하 예배를 드릴 예정입니다. 동문 및 동역자 여러분의 기도를 부탁합니다. 
    Read Mo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