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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선지자가 왜 욕을 해! "정성구 박사(전 총신대·대신대 총장)" 미주교회신보2022.07.07
    최근 수년 전부터, 나는 매 주일 칼럼을 쓰고 있었다. 들리는 말로는 국내의 모든 교파의 교역자들과 평신도들 그리고 선교사들과 해외동포를 합하면 적어도 10만여 명이 필자의 글을 읽고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이 글들이 묶어져서 <목사가 왜 욕을 해>, <목사가 왜 정치를 해>라는 책이 출판되어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3년 동안 한 주일도 빠짐없이 매주 칼럼을 쓰는 것은 여간 부담되는 것도 아니고, 소재의 한계도 있고, 정권과 교권을 동시에 깨우는 것에 독자들의 감동을 일으키는 것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때는 밤잠을 자지 못하고, 밤을 꼬박 세우면서 화제를 생각하다 보면 새벽 2~5시까지 집필을 하였다. 읽는 분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읽고 댓글을 달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한 주제를 가지고 사투를 벌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지금도 첫잠에서 깨어나서 새벽 1시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왜냐하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자, 신약의 순교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전령자로서 길을 닦는 선지자 세례요한의 거침없는 욕설,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그의 욕설 때문이다. 일반인의 인식은 목사와 장로는 욕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별명을 가진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은, 거친 야생마처럼 당시의 종교와 정치의 지배층과 특권계급을 향해서 듣기에도 섬뜩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욕을 퍼부었다.그렇다면 선지자 요한은 왜 이런 욕을 했을까? 선지자라면 좀 스마트하게, 표준말로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또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어야겠지만, 나실인인 세례요한은 거침이 없었다. 나실인은 본래가 여호와의 참 종교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고, 독주를 마시지 않고, 시체에 손을 대지 않고, 머리털과 수염을 깎지 않는다. 또한 나실인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 절제와 순종을 삶의 원리로 살아간다. 그런데 선지자 세례요한은 나라 빼앗긴 가난한 백성들에게 좀 더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고, 간담이 서늘하고, 불쾌하고, 입에 담지 못한 욕을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무차별 퍼부었다.세례요한의 본래 사명은 광야의 소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자의 사명을 받았다. 때문에 그는 불도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언덕을 깎고, 골짜기는 메꾸고, 돌덩이는 골라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이룩하실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전위대였다. 당시 사람들 특히 바리새파 사람들은 종교인이었지만, 성경적 신앙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기득권 사수, 스팩, 혈통, 역사적 관습, 전통을 지키고 화석처럼 굳어있는 종교 행위를 신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들의 속은 예수님이 말씀한 데로 썩어 냄새가 났다. 한마디로 겉만 화려하게 횟가루를 발라놓은 무덤같은 종교였다. 또한 사두개인들은 정치가들로서 내세도, 천사도 믿지 않으면서 제사장직을 독점하고 있었고, 유대 최고법정인 산헤드린 공회를 완전 장악하고 있었던 철두철미한 세속인들이었다. 이 자(者)들의 생각에 자기들은 뼛속까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유대교의 교육을 확실히 받고, 토라를 외우고 있으니 구원은 이미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자기들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그런데 이 자(者)들을 향해 <독자의 자식들!>이라는 세례요한의 폭탄적 메시지는, 당시 정치 집단과, 종교 집단을 향한 엄청난 욕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욕을 해도 좀 비유적으로 점잖게 할 수가 없는지? 선지자답게 권고와 위로와 평강을 줄 수 없는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좋은 말로 이렇게 말했으면 어떨까? 마치 교황이 말하듯, "여러분 행복하세요!", "서로 용서하고 평화를 말하시오!" 등등... 분명 좋은 말이다. 오늘의 목사님들도 좋은 말을 많이 한다. "인간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 "자존심과 자긍심을 가지세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세요" 등등... 분명 이 또한 좋은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성경도 아니고, 복음도 아니다. 만약 요즘 세례요한처럼 불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는 교회에서 즉시 쫓겨날 것이고, 이단으로 소송이 제기될 것이다.그런데 세례요한은 선지자의 소명과 사명자로서, 생명 걸고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 받는다!"고 피맺힌 열정으로 절규하며 고함쳤다. 왜 절규하며 욕을 했는가? 혈통과 스팩과 전통에 단단히 굳어진 돌맹이처럼 희망 없는 자들에게는, 부서지고 가루가 되는 <회개>의 과정이 있어야 복을 받고, 비로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선지자 세례요한이 거친 광야에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놓고 직사포로 욕을 한 것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타는듯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세례요한은 그들에게 "하나님은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다"고 전했다. 즉 돌처럼 굳어지고 이스라엘 광야에서 굴러다니는 돌맹이처럼, 천한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권능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무능하고 타락한 인간은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복음을 제시했던 것이다. 때문에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바울의 신학과 다르지 않다. 세례요한은 바로 그 당시 종교개혁자이다.선지자 세례요한! 그는 그냥 거친 욕쟁이가 아니고, 돌덩이 같은 인간을 갖고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만들 수 있다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Sola Gratia)의 복음을 증거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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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신성욱 교수" 미주교회신보2022.07.07
    [1] 인간은 선과 악 중에서 무얼 선택할까? 성경적으로 말하면 악을 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 왜 악을 즐겨 택하는 걸까? 그건 루터의 말처럼 인간 안에 '구부러진 마음'(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에게 손해가 되거나 위험이 초래될 거 같은 상황에선 선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는 이들이 참 많다. 소극적인 죄를 짓는 셈이다. 하지만 누구나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2] 가끔씩 이것을 반전시키는 예외적인 사건이 발생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주기도 한다. 전철 안에서 나이 어린 사람이 노인들에게 행하는 막말이나 볼썽사나운 행동이 담긴 영상을 접할 때가 종종 있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중학생처럼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가 할아버지에게 욕을 하면서 마구 때리는 영상이 올라왔다. 주변에 있는 누구도 개입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분노가 치밀었다.[3] '아, 내가 저 자리에 있었으면...'하는 생각이 물밀 듯 몰려왔다. 바로 그때 영웅이 나타났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다가와서는 그 남학생을 꾸짖으며 할아버지가 맞지 않도록 온 몸으로 막아준다.그래도 해결의 기미가 없자 청년은 할아버지를 모시고 다음 정거장에 같이 내렸다. 그 광경을 영상으로 찍으면서 같이 내리던 한 사람이 청년에게 묻는다.[4]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느냐고? 그때 청년은 울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각나서요!" 골치 아픈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아무도 나서지 않았으나, 그 청년은 유일하게 할아버지가 젊은 애한테 당하는 걸 막아주었다. 이유는 뭘까? 자기 할아버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이와 흡사한 충격적인 실화가 하나 있다.[5] 2015년 7월, 과테말라에서 일어난 일이다. 열두 살 소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리엘 에스칼란테 페레즈이다. 그는 수업 후 집으로 가던 스쿨버스가 갱단에게 납치되는 사건을 겪는다. 갱단 조직원은 그에게 권총을 주며 버스 기사를 쏘면 살려 주고 안 쏘면 너를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소년은 끝내 총을 쏘지 않았다.화가 난 갱들은 다리로 가서 그를 던져 버렸다.[6] 135미터 높이의 다리였다. 그는 사흘 뒤 온몸이 부서진 채 발견되었지만, 기적같이 숨은 붙어 있었다. 아리엘은 소식을 듣고 찾아온 아버지를 꼭 껴안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5일 후 눈을 감고 말았다.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다.아리엘은 갱들의 위협을 거부하고 자신이 죽는 것을 선택했다. 이럴 경우 압도적인 다수는 제 목숨 살리려 버스 기사를 총으로 쏴 죽였을 것이다.[7] 과거 미국 유학 시절 대한민국을 온통 경악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지존파 사건'이 떠오른다. 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을 자기들이 만든 살인 아지트에 끌어와서 총으로 쏴 죽여서 불태우는 끔찍스런 일당들에게 한 부부가 잡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학교 선배 교수가 다니던 교회의 신앙 좋은 부부였다. 살인마들은 거기 끌어온 처녀 한 사람에게 총을 주면서 그 부부를 죽이라고 했다.[8] 어찌 됐을까? 이 처녀는 자기가 살기 위해 두 눈을 꼭 감고 그 부부를 죽였다. 나중에 그녀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살인마 한 명과 병원으로 가던 중 도피해서 경찰에 신고함으로 그들의 전모가 밝혀지긴 했다. 그랬다. 그런 위기의 상황에서 자기 목숨을 희생해서 남의 생명을 살려주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그런데 어째서 아리엘은 갱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죽음을 선택했을까?[9] 아버지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자기 아버지도 버스 기사였다. 자신이 탄 버스의 기사가 아버지라 생각하니 쏠 수가 없었던 것이다.이게 바로 '감정이입'(感情移入, empathy)이 가져다주는 대단한 힘이다. '공감'(共感, symphony)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게 없었더라면 누구도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이름도 모르는 타인의 목숨과 바꾸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10] '생명경시'의 현상을 사회 전반에서 볼 수 있다. 이웃의 아픔과 고통이 외면되고 있는 현실을 자주 본다. 대상이 내가 싫어하고 혐오하는 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남기신 이유가 뭘까? 제한되고 편협 된 이웃의 개념을 깨기 위해서이다. 피를 섞은 사마리아인이나 창녀나 죄수나 한센씨병 환자나 강도나 살인자나 일본 놈이나 주님 눈에는 모두가 자기 양들이다.[11] 부모나 형제나 가족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용서 못할 이가 없고, 사랑 못할 이가 없다. 적어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자기 눈앞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만이라도 자기 가족 중 한 사람과 동일시 할 줄 아는 관점이 필요하다. 다른 이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차별화 된 용기'는 그럴 때 발휘가 되는 것이다.빌 2:3~4절의 말씀대로 잘 살아서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12]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신성욱 교수(아신대 설교학) (출처 기독일보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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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6.25 전쟁: 참상의 기억을 넘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떠올리는 날로 미주교회신보2022.07.07
    6.25 전범,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구약 전도서에는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전 8:14) 라는 말씀이 있다. 잘 수긍하기 어렵고 쉽게 헤아리기 어려운 내용이다. 전도서 기자는 17절에는 지혜자라도 능히 알지 못한다고 일괄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일들이 다반사다. 우리 각자의 인생 가운데서도, 이 민족의 역사 가운데도 말이다. 그 중에 72년 전, 오늘 일어난 6.25사변이 그렇다. 이 전쟁은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다.악인들인 북한의 김일성, 소련의 스탈린, 중공의 모택동이 일으킨 이 전쟁으로 무고한 백성들이 죽어갔다. 남북한 군인, 민간이 다 합쳐 약 380여만 명이 사망에 이르렀다. 이 수치는 당시 인구가 3천만이었으니 12%를 넘어선다. 6.25 전범하면 우리는 김일성만 떠올리는데, 스탈린이 전쟁을 승인했고, 모택동은 전쟁 전에 이미 엄청난 병력을 지원했다. 우리는 대부분 역습과정에서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9.15) 이후, 서울수복(9.28)하고 북진해서 압록강에 다다를 때 수십만의 중공군이 인해전술(人海戰術)로 쳐내려온 것만 기억하는데, 이미 모택동은 중국대륙에서 벌어진 국공내전에 전투경험이 있는 조선족 병사들 중, 3만 9천여 명을 전쟁이 나기 전인 1949년 7월부터 북한지역에 파견했었다.김일성이 남침을 개시할 때 북한병력이 총 20만이었는데, 그중 4만여 명이 조선족 병력이었다. 그리고 각 사단을 지휘했던 장성들도 대부분이 조선족들이었다. 1사단장 최공, 2사단장 이청송, 4사단장 이권무, 5사단장 김창덕, 6사단장 방호산, 7사단장 전우 등 10개 사단 중에 6개 사단의 지휘관이 조선족 장성들이었다. 이처럼, 중공도 전쟁 전부터 깊이 개입했고 모택동도 6.25사변의 전범 중 하나이다. 그런데, 지난 정부시기,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다수의 여권의 유력 정치인들이 공산당 창건 기념일을 경축하는 축전 및 축하 메세지를 보냈었다. 너무나 비정상적으로 돌아가던 시기였다. 이때 중국의 시진핑은 6.25 전쟁을 "제국주의 침략자에 대한 정의로운 전쟁이었다"라고 선언했었다. 그런데, 항의는 고사하고 장단을 맞추었으니 어찌 역사 앞에 죄인이라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다행이도 안보를 국시로 하는 새 정부가 들어섰고 이번(24일)에 6.25 참전 용사들을 초청하여 극진히 대접하며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한 영웅들"이라고 존경을 표한 것을 보면서 내심 안심을 놓게 되었다.전쟁 전, 하나님의 경고와 참회기도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지고 남한 땅에 죽음의 공포가 휘몰아칠 때 많은 기독교인들은 왜 전쟁이 일어났지, 왜 하나님은 전쟁을 막아주지 않으셨을까? 라는 질문을 하면서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회개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중에 하나가 이미 전운이 감돌았었고 경고의 메시지가 강력하게 선포되었지만 귀를 기울이지 않고 방심을 했던 것이다. 전쟁이 터지기전 남한내에는 제주4.3사건(1948.4.3.), 여수·순천사건(1948.10.19.) 등 전국적으로 좌익들의 준동이 극에 달했었고 심각성을 감지한 한경직 목사님을 비롯한 교계 지도자들이 전국적인 순회 집회를 진행하며 공산주의에 대한 위험성을 설파했었다. 이것이 바로 요나를 통해, 니느웨 도성에 회개를 촉구했던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였던 것이다. 니느웨 모든 백성은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했지만, 남한 백성들은 그러지 못했다.결국, 전쟁은 터졌고 그때서야 목회자들은 피난 가는 지역마다 간이교회를 세워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회개의 기도를 하늘로 올리기 시작했다.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쳐내려오고 이제 부산지역만 남는 풍전등화 속에 회개의 기도는 울부짖음이 되었다. 부산지역 교회 및 여러 공공장소에 운집한 수많은 성도와 목회자들은 피눈물의 회개를 올렸다. 초량교회에는 한상동, 박형룡, 박윤선 목사를 비롯해서 약 250여명의 목회자들이 모였고 8월 말에서 9월 중순까지 2주 동안 국난 극복을 위한 구국기도회를 열었다. 이때 일제 치하 때 벌어졌던 신사참배, 우상숭배의 죄를 뜨겁게 참회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뜨겁게 회개의 기도가 하늘로 올려지고 난 3일 후에 성공확률이 5000분의 1밖에 안 되는 인천상륙작전(9.15)이 성공하게 된 것이다. 서울을 수복한 맥아더 장군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고 증언했다고 한다.6.25 전쟁, 참상기억을 넘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념하는 날로6.25는 민족사에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될 너무나도 끔찍하고 비극적인 전쟁이었다. 그 참상은 이루말할 수 없으며 우리는 6.25를 맞을 때마다 그 아픔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비극만 떠올리며 아파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악을 선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역사를 되짚어 보며, 통일의 소망을 품는 시기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 6.25전쟁 가운데도 역사하신 하나님은 전후에도 이 민족 가운데 강력하게 개입해주셨다.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공산주의의 허상을 경험케 하심으로 자유민주주의 소중함을 철저히 깨닫게 하셨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1953.10.1.)을 통한 굳건한 한미동맹으로 안보를 튼튼히 해주셨다. 시장경제시스템을 구축케 하셔서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를 받게 함으로 빠른 전후복구사업을 통해 이 나라를 다시금 일으켜 주셨다.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하셨다.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는 지난 정부로 인해 다시금 위기를 맞았지만, 다시금 자유를 강력히 외치는 지도자를 세워주심으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신 하나님이시다. 6.25를 기념하는 이날, 전국 곳곳에서 나라의 안녕을 위해,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수많은 이들의 모습들에서 향후, 하나님의 역사하실 일들을 기대해 본다. (출처 기독일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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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잘 될 것이요 "김병렬 목사, 찬양교회" 미주교회신보2022.07.07
    [전]8:12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전]8:13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12절은 죄인이 백 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한다는 말로써 현실적으로 악에 대한 심판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백 번’이라는 말은 ‘무수히 많다’는 의미입니다. 즉 악인들이 악행을 무수히 저지르고 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악을 행하다’라는 동사가 분사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악인들이 과거에 수 없이 많은 악을 행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많은 악을 계속해서 범하는 자에게 임하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장수입니다. 성경에서 장수는 일반적으로 선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악인이 장수하는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반절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잘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악인들이 현실 가운데 흥왕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에서는 악인이 흥왕할 수도 있으나 궁극적으로 잘되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종말론적 심판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13절에서는 악인의 종말론적 심판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라는 선언은, 앞서 12절에 나온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라는 내용과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모순이 아닙니다. 12절은 현상적인 측면을 말한 것인 데 반해 13절은 종말론적 실상을 나타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악인이 악을 행하면서도 장수를 누리는 부조리가 분명 존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록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나 징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때와는 달리 지체된다 할지라도 최종적으로 악인에게는 무서운 형벌이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악인이 아무리 장수한다 하더라도 그의 삶은 결국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이 때 ‘그림자’라는 것은 허무하고 헛된 것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악인의 삶이 헛되고 잘 되지 못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인생이 잘 될 수 있는 비결을 알려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경외’라는 말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그로 인해 느끼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두려움과 존경의 마음을 말합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또한 영혼을 멸하실 수 있는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존경한다면 당연히 죄와는 멀어질 것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 주시며 잘 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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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갑옷 솔기의 인생 "박병훈 목사, 유니온교회" 미주교회신보2022.07.07
    아합의 최후에 대하여 설명하는 열왕기상에서는 이스라엘의 아합왕이 유다의 여호사밧왕에게 이르기를 나는 변장하고 군중으로 들어가려 하노니 당신은 왕복을 입고 가라고 합니다. 그래서 아합왕은 변장을 하고 전투를 합니다. 그러나 아람왕이 지휘관 삼십이 명에게 오직 아합왕과만 싸우라고 합니다. 그런데 무심코 쏜 적병의 화살 하나가 아합왕의 갑옷 솔기에 꽂혔습니다. 이때 왕이 자기 전차병에게 ‘내가 부상을 입었습니다. 아합왕이 전차를 돌려 여기서 빠져나가자!’ 라고 하였으나 하루 종일 전투가 치열하므로 아합왕은 자기 전차에 버티고 서서 시리아군과 맞서 싸우다가 저녁때에 죽었으며 상처에서 흘러내린 피가 전차 바닥에 흥건하게 고였습니다. 아합왕은 이름도, 얼굴도 모르는 군인이 쏜 화살에 맞고서 전쟁 중에 죽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하시면 어느 누구도 피해갈 수 없고 이렇게 끝이 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 그대로 개들이 피를 핥아먹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전차는 창녀들이 목욕하는 사마리아 연못에서 씻었는데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대로 개들이 와서 그 피를 핥아먹었다.(왕상22:30-38)‘갑옷 솔기’는 무엇입니까? 갑옷은 두텁게 만들거나 통으로 만들지 않습니다. 전투를 할 때 가볍고 자유로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솔기를 만드는 것입니다. 즉 작은 조각들을 연결시키거나 어끗맡추어 만듭니다. 특히 왕의 갑옷은 만든 장인이 직접 입고 시연을 해야 합니다. 그러니까 잘못 만들면 자기가 죽는 것입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왕의 갑옷입니다. 그러니까 갑옷에서 가장 약한 부분은 솔기부분인 것입니다. 갑옷의 약점, 단점, 문제인 것입니다. 우리도 누구나 ‘자기’라는 갑옷을 입고 삽니다. 자기라는 갑옷이 두터울수록 자우롭지 못합니다. 그래서 갑옷은 가벼우면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자신이 가장 약한 부분이 있고 단점이 있으며 문제들을 다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약점과 단점을 보완하기 위해 노력을 하고 조심하기도 합니다. 또한 그것들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열심히 감추며 살기도 합니다. 이것이 허점이기에 문제가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문제가 나 자신의 무능함으로 비춰질 수도 있고 비난 거리로도 보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을 꽁꽁 숨기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이것이 우리의 솔기인 것입니다.   그런데 아합왕의 이야기에서 그가 죽게된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우연히 또는 무심코’라고 합니다.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톰’인데 완전함, 무결, 성실함의 뜻으로 타암(완전함 completeness, 청렴, 무결, 순결, 성실 integrity)에서 유래 했습니다. 그런데 다른 뜻으로 ‘단순, 순진’이란 뜻으로 아무 결정한 목적 없이 행하는 것에 쓰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우리말 성경에서는 무심코 또는 우연히라고 번역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화살이 빗발치는 전투 속에서 아합왕을 겨냥한 것도 아닌데 무심코, 우연히 날아온 화살이 하필 약한 솔기를 파고들어 맞은 것입니다. 그렇게 죽은 아합왕의 피를 개들이 핥아 먹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갑옷을 든든히 입고 혹시 모를 위험을 피하기 위해 신분을 위장까지 하고 안전하게 살고자 합니다. 그러나 무심코, 우연히 우리의 약점과 단점을 파고드는 화살에 언제 맞을지  모릅니다. 대단한 위세를 떨치며 세상을 호령하던 아합왕이지만 그의 마지막은 무심코 손 화살에 별 의미없이 가버렸습니다. 세상은 화살들이 난무하는 전쟁터 같은 곳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질병이, 어떤 문제가, 어떤 인간관계가 화살이 되어 우리의 갑옷 솔기를 뚫고 들어올지 모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문제는 무심코, 우연히 일어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무심코와 우연히를 주장하시는 주님 안에서 주님의 뜻을 묵상하고 기도하며 순종하는 성도의 삶을 사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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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목회] 절망 앞에선 희망 "김형섭 목사, 성실교회" 미주교회신보2022.07.07
    하나님께서는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남유다 백성에게 바벨론에 순순히 항복하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남유다의 왕과 신하들과 백성들은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고,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야 한다는 것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끝내 듣지 않음으로 결국 예루살렘 성전과 왕궁과 집들은 모두 불타고, 수많은 사람은 목숨을 잃습니다. 그렇게 예루살렘이 완전히 황폐해진 후에 모두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게 되는 수난까지 겪게 됩니다.이렇게 예루살렘 성전이 불타는 절망 앞에서 예레미야 선지자는 간이 땅에 쏟아지는 고통을 느끼며 밤이 새도록 웁니다. 그러다가 놀랍게도 새벽녘에 예레미야 선지자가 다시 소망을 노래하기 시작합니다.“이것을 내가 내 마음에 담아 두었더니 그것이 오히려 나의 소망이 되었사옴은 여호와의 인자와 긍휼이 무궁하시므로 우리가 진멸되지 아니함이니이다 이것들이 아침마다 새로우니 주의 성실하심이 크시도소이다”(예레미야애가 3:21~23)“주께서 인생으로 고생하게 하시며 근심하게 하심은 본심이 아니시로다”(예레미야애가 3:33) 남유다 모든 사람이 진멸당하지 않고 이미 1차와 2차 포로로 바벨론에 끌려가 있는 사람들이 희망임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본심이 마음 언약임을 알게 되고 ‘새 언약을 예고’합니다. 이것이 바로 예레미야의 ‘희망 선언’이었습니다.“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 집에 새 언약을 맺으리라.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조상들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맺은 것과 같지 아니할 것은 내가 그들의 남편이 되었어도 그들이 내 언약을 깨뜨렸음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그러나 그 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러하니 곧 내가 나의 법을 그들의 속에 두며 그들의 마음에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예레미야 33:3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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