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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 그림이 있는 성서 에세이5/가버나움의 빈들 미주교회신보2022.09.20
      《씨앗이 담긴 컵 2008. 황학만 作》   귀에 익은 ‘가버나움’-. 오천 명이 앉아 식사를 하고도 남을 만큼 넓은 언덕진 그곳은 갈릴리호수 북쪽에 있다. 예수께서 산상수훈(山上垂訓)을 설파하셨던 자리에는 팔복예배당이 자리하고 있고, 호수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나부끼는 루비 빛 꽃들은 그곳을 찾는 순례자들에게 천국복음을 상기케 한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예수께서는 가난했던 그들에게 천국은 세상 그 무엇으로도 배부르지 못하는 이들의 것이라고 외치셨다. 예루살렘터미널에서 갈릴리 행 버스를 타면 호수 남서쪽 ‘디베랴’에 도착하고, 그곳에서 여객선을 타면 호수를 빗겨 질러 ‘가버나움’으로 가게 된다. 파도를 헤치고 가는 배를 뒤따르는 갈매기 떼 울음소리가 마치 사도들이 떠드는 소리인 듯 들린다. 삼킬 것 같은 파도에 놀라서 잠든 스승을 깨우거나, 물 위로 걸어오시는 스승에 놀라는 제자들의 소란, 그리고 그 호수를 ‘바다’라 부르며 고기 잡던 제자들의 떠드는 소리다. 디베랴마을에서는 ‘디베랴 바다’라고 부르고, 긴네렛 마을에서는 ‘긴네렛’이라고 부르는 거대한 갈릴리호수는 그들에게 정녕 바다였다. 그곳은 장차 제자들이 사람 낚는 어부가 되기 위한 수련장이었다는 듯이 때로는 폭우가 몰아치고 성난 파도가 요동하기도 한다. 호수의 동쪽에 ‘거라사’, 북동쪽에 ‘벳새다’, 북쪽에 ‘가버나움’, 그 윗마을 ‘고라신’, 서쪽에 ‘디베랴’, ‘막달라’ 거기서 몇 개의 언덕 너머 ‘가나’와, 그 너머 아래 외딴마을이 ‘나사렛’이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외면하시고, 헐벗고 가난한 갈릴리사람들에게 천국설파와 표적(表迹)을 보여 천국의 실상을 알리셨다. 그러나 빚어진 결과는 비통한 절규였다. “화 있으리라 ‘고라신’아-! 화 있으리라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라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가버나움’아-! 네가 하늘에까지 높아지겠느냐? 음부까지 낮아지리라. 심판 날에 ‘소돔’땅이 너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그럼에도 그들 곁을 떠나지 않으신 까닭은, 그들 넘어오고 오는 세대에도 그 천국을 알리셔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오늘날 우리의 귓전에도 그때 그 이야기가 들리는 것이다. “씨 뿌리는 자가 씨를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져서 새들이 와서 먹어버렸고, 더러는 흙이 얕은 돌밭에 떨어져서 싹이 났으나 해가 돋은 후에 뿌리가 말랐고, 더러는 가시떨기 위에 떨어졌으나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았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져 혹 백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 결실하게 되었지.” 세월이 흘렀다. 어느덧 지구 뒤편에서도 그곳을 성지라 부르며 순례 길을 떠나더니, 시대가 급변했다. 그새 상대적 빈곤이라는 허상이 밀고 들어와 굶주린 이들을 내몬 것이다. 천국이 저들의 소유라면, 정작 가난한 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허공에 산화한 그 말씀은 무엇으로도 채우지 못하는 이들의 마음 밭을 찾는데, 상대적 빈곤을 가난이라 하는 세대에 산상수훈은 도대체 어디에 떨어졌을까?어쩌면 우리가 부유한 나머지 부족한 것이 없다는 ‘라오디아교회’였는지도 몰라 귀를 기울이게 된다. “네가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볼지어다. 내가 문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계3:17, 20) 또다시 옥토를 찾는 씨앗, 오늘도 여전히 그 가버나움 허허로운 빈들이다. (출처 한국교회신보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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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간첩 목사 소강석, 가짜 목사 타도’라니? 미주교회신보2022.09.03
    남가주교계연합회(상임대표회장 신승훈 목사)가 지난 8월 15일 광복절을 맞이하여, 새에덴교회 담임 소강석 목사를 강사로 초청, 제77주년 광복 감사 부흥집회 및 교회 회복 부흥 세미나를 주님의영광교회에서 가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진실을 호도하며 집회를 조직적으로 방해하는 보이지 않는 무리들이 소강석 목사를 간첩 목사 또는 가짜 목사라며 행사 당일 날 주님의영광교회에 앞에서 피켓 시위를 했다.    이들은 또한 남가주 교계에서 영적 지도자로 왕성한 활동을 하며, 교계에 선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귀한 목회자(민종기 목사, 한기홍 목사, 진유철 목사, 신승훈 목사) 들을 좌파라는 프레임을 씌어 행사장에 갈 수 없도록 당일 오전까지 집요하게 방해를 했다.    다음은 집회를 조직적으로 방해한 자들이 카카오톡과 주님의 영광교회 앞에서 직접 전달한 글의 일부 내용임을 밝힌다.    『문재인과 이재명과 자유대한민국에 널리 퍼진 주사파 공산주의자들과 같이 이준석, 유승민, 김무성, 권성동 등 모두는 좌파가 보낸 트로이 목마에 숨어 나온 좌파 전사들이다. 이와 같이 간첩 종북 목사들도 마찬가지 트로이 목마에 숨어있다 나오는 좌파 공비들이다. 그들은 우파와 자유민주주의를 패망시키는 것이 목적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다시 오실 예수님의 대로를 막고 나서고 있는 좌파 간첩 목사들은 적그리스도와 같은 매우 위험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교회를 장악하고 성전 십자가 앞에 앉아 꽈리를 틀고 있는 사탄의 흰 백사들이다.    거기에 합세해서 주님의 영광교회와 형제교회인 은혜한인교회의 현 담임목사 한기홍 목사까지 북한 간첩 소강석 가짜 목사와 합세해서 집회를 한다는데 우리 주님이 이를 그냥 잘한다고 내버려 두라 하시지는 않으실 것이다. 이에 예수님의 피의 은혜를 입은 성도라면 당연히 의분을 참지 못 하여야 하리라 믿는다. 이는 결코 외면할 수 없는 일이며 배도이다. 이 시대는 시온 사상인가? 마귀 사상인가?    적그리스도들과 세계 정부론자들은 공산 전체주의자들을 이용해서 마침내 오실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를 배교케 하기 위함 계략을 정치, 경제, 문화, 교육, 예술, 종교 기독교계가 가장 큰 타깃임을 알고, 정신 바짝 차려 우리 믿음의 성도들은 영적 분별력으로 날마다 깨어 불법의 사람 미혹의 영을 가진 자들을 분별하여 이기는 자들 되어 주님 재림 시 예수님의 혼인잔치에 참예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기를 기원한다.』    윗글을 읽어 본 독자 여러분들의 생각은 어떠한지 참으로 궁금하다. 옛말에 칼로 벤 상처는 쉽게 아물지만 말로 벤 상처는 평생 간다는 말이 있다. 정확한 사실을 무시한 채 간첩 목사 소강석, 가짜 목사 타도라니? 정말 섬뜩하지 않을 수 없다.    소강석 목사님은 새에덴교회 담임목사요, 한국기독교 최대 교파 중의 하나인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측 전 총회장이요, 한국교회총연합회 대표회장을 역임하신 목사님으로, 지난 16년 동안 6.25 참전 용사들 5천 명 이상을 섬기신 목회자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당치도 않는 말을 쉽게 할 수 있는지 그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측 목회자들을 한꺼번에 모독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또한 간첩 종북 목사들도 마찬가지 트로이 목마에 숨어 있다 나오는 좌파 공비라니….    소강석 목사에 대한 내용을 자세히 알아보고 신중하게 접근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저 아니면 말고식의 간첩 목사, 가짜 목사라고 주장하니 참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지금은 그 어느 때 보다도 그리스도인들이 주 안에서 하나 되어 대통령과 위정자들과 대한민국을 위해 힘껏 기도할 때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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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성평등과 양성평등 최태호교수2022.08.09
    성평등과 양성평등중부대학교 한국어학과교수 최태호   오늘 다룰 주제는 조금 무겁다는 느낌이 든다. 참으로 요즘은 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것이 껄끄럽기도 하고 몰매를 맞기도 쉽다. 그러나 성평등이나 양성평등에 관한 개념은 명확하게 하고 갈 필요가 있다고 본다. 팔자의 의견이 다 옳다고 보지는 않는다. 하지만 이 시대를 살아가는 가장 보편적인 언어학자요, 아버지의 글이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이다. 필자도 초보 교사 시절에는 숙직에 관한 불만이 많았다. 태능중학교에 근무한 적이 있었는데, 한때는 숙직을 할 수 있는 남자교사가 일곱 명에 불과해서 매주 월요일마다 숙직을 한 적이 있다. 사실 그때는 오히려 숙직이 좋았다. 성남에서 태능까지 출·퇴근하는 것이 쉽지 않아서 숙직하면서 학교에서 자는 것이 오히려 편한 적도 있지만 1년을 그렇게 하다 보니 일직만 하는 여교사들에게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군대에 다녀왔다는 이유로 의료보험료 한꺼번에 내는 것도 불만이었고, 남자라는 이유로 학생부에 근무하면서 추운 겨울날 정문지도하기는 더욱 힘들었다. 정문지도비로 한 달에 3000원 더 받는다고 직원회의 때 마이크 잡았던 여고사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얼마나 화가 났던지 벌떡일어나서 “그럼 내일부터 네가 정문지도해 봐.”하고 직원회의장 박차고 나온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 요즘은 남자 경찰들이 역차별이야기를 하면서 양성평등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어느 사회나 차별이 있는 것은 인정하지만 지나치면 문제가 된다. 교사들이 학생부에 근무하는 것을 꺼리듯이 경찰들은 기동대에 근무하는 것이 싫은가 보다. 군대는 보직이라고 하더니 일반 사회도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양성평등은 필자도 전혀 반대하지 않는다. 당연히 인간이라면 모두 평등해야 한다. 차별해서도 안 된다. 그러나 차별금지법은 다르다. 평등해야 한다고 해서 차별하지 않는다는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이민자나 다문화가족 등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 마찬가지로 성적 소수를 차별해서는 안 된다고 하지만 성적소수자에는 LGBT(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 트랜스젠더)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동성애자나 시체성애자, 동물성애자, 노인성애자, 사물성애자 등도 여기에 포함된다. 아동성애자로 인해 피해를 본다면 그 부모의 심정은 어찌해야 할 것인가? 성적소수자의 행위이니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인지, 금지된 범법행위이니 처벌해야 할 것이지 말하지 않아도 독자들은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양성평등이라는 말은 “ 남성과 여성의 두 성이 권리나 의무, 신분 따위에서 차별이 없고 한결같음”을 말한다. 그러니까 일반적으로 사회적 차별을 말할 때는 양성평등이라는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본다. 필자의 교사 시절이나 지금 경찰들이 기동대 얘기를 하는 것은 모두 양성평등에 어긋나기 때문에 남성들이 역차별을 받고 있다고 항변하는 것이다.(사실 이것은 평등의 문제를 떠나 조직의 비율의 문제로도 볼 수도 있다. 남경과 여경, 남교사와 여교사의 비율이 지나치게 편중되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편 성평등은 “성을 이유로 차별받지 않고 법률적 권리나 사회적 대우를 동등하게 받는 것”을 말한다. 예문으로는   칼럼에는 성평등의 실현을 위해 남성들이 먼저 변화되어야 한다고 제시되어 있었다. <고려대한국어사전>   마치 성평등 의식이 차별금지와 같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은 것 같다. 이 두 가지의 주제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성평등 의식과 성적 소수자의 문제도 다르고 차별금지와 양성평등의 문제도 각각 다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사람들은 백두대간을 얘기하면서 그 속에 있는 나물은 그냥 넘어가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필자가 볼 때는 오히려 반대의 경향을 보이고 있다. 백두대간을 얘기하면서 내심 작은 산맥은 두루뭉수리 넘어가자는 속셈이 드러나 보인다. 때로는 하나하나의 의미를 정확하게 규명하고 마무리를 지어야 한다. 굳이 성평등 운운하면서 차별금지법과 연관지어서는 안 된다. 개념을 명확하게 하지 않으면 혼란이 야기된다. <논어>에 나온 대로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아들은 아들다워야 한다.(君君臣臣父父子子)” 이것이 정명(正名)사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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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의사가 좋은 직업은 아니죠! "이상기목사" 미주교회신보2022.08.06
    지난 7 월 20일은 수요일이었습니다. 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오른쪽 눈에 통증이 왔습니다. 즉시 거울 앞에 서서 눈을 살피니 오른쪽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있으며 눈 위쪽으로는 다래끼가 났을 때처럼 불편함이 느껴졌습니다. 이럴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했지만 특별한 방법이 없었습니다.아침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오른쪽 눈에 통증이 왔습니다. 즉시 거울 앞에 서서 눈을 살피니 오른쪽 눈이 붉게 충혈 되어 있으며 눈 위쪽으로는 다래끼가 났을 때처럼 불편함이 느껴졌습니다. 이럴 때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를 생각했지만 특별한 방법이 없었습니다. 불편함 몸을 이끌고 교회로 향하는 길에 10여 년째 다니는 안과병원에 운전하던 차를 길가에 세우고 전화를 했습니다. 그랬더니 필자가 가지고 있는 보험이 HMO이기에 먼저 주치의에게 전화해서 안과병원 방문 허락을 받으라고 해서 즉시 주치의에게 전화했습니다. 그러한 절차가 그렇게 빠르게 이루어지는 줄 몰랐습니다. 주치의 사무실 직원이 필자의 인적 사항을 확인하고 나서 곧 바로 안과병원으로 가라고 했습니다. 시간이 불과 5 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안과병원에 그 같은 사실을 알리고 언제 의사를 만날 수 있느냐고 했더니 두 시간 후 진료실로 나오라고 했습니다. 단 예약 손님의 진료가 끝이 난 다음에 진료 받을 수 있다고 했습니다. 11시 반까지 오라고 했지만, 진료실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 45분이었습니다. 진료실에는 언제나처럼 많은 환자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필자가 다니는 안과병원은 LA 한인 타운에서 환자를 사랑과 정성으로 잘 진료한다고 소문난 곳이기에 언제나 환자가 넘쳐났습니다. 환자들의 대부분은 나이가 많으신 어르신들이었습니다. 통증을 견디기 어려운 환자 중에는 기다리는 시간이 너무 힘들다고 직원에게 호소하시는 분들도 계셨습니다. 예약 환자들의 대부분이 한 시간 이상을 기다려야 하셨습니다. 그러니 필자도 의사를 만나기까지는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두 시간 이상 기다리는 동안에 의사 선생님이 분주하게 오가시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때 필자의 마음에 의사는 무엇인가에 대해서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쉬운 직업이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우리의 삶에서, 없어서는 아니 되는 고마운 분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많이 밀려드는 환자들을 같은 사랑으로 섬겨야 하기 때문입니다. 의사라고 왜 피곤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왜 쉬고 싶은 마음이 없으시겠습니까? 그러나 정한 시간에 기다리는 환자들의 아픔을 치료하기 위해서는 힘들어 쉬고 싶어도 마음대로 쉴 수가 없으신 겁니다. 그 생각을 하면서 의료인들에게 존경하는 마음과 감사하는 마음을 더하게 되었습니다. 차례가 되어 2 시간 여 만에 의사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의사 선생님을 뵈올 때마다 드리는 인사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한 인사는 “의사가 힘든 직업이시네요, 얼마나 힘드세요, 쉼이 필요하시겠습니다”라고 했더니 그에 대한 답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네 의사가 좋은 직업은 아니죠” 그 말은 일반 사람이 생각하는 것처럼 쉬운 직업이 아니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의사만이 가지는 아픔과 고통이 있으시다는 말로 이해가 되었습니다. 환자들이 만족한 치료를 받고 받고 고통에서 벗어나 밝은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환자들의 아픔을 도와주기 위해서 쉼 없이 연구하고 노력하며 실행하시는 모습에서 크게 감사하는 마음과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의사는 누가 될 수 있는가? 미국에서 의사가 되는 것은 쉽지가 않습니다. 원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필자의 둘째 사위가 의사가 되는 과정을 곁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미국의 의료제도를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의사를 신뢰하게 되었습니다. 의사가 되는 길은 너무 길고 어렵습니다. 그 어렵고 힘든 과정을 통하여 의과 대학에 입학을 허락 받았다고 다 의사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 내 모든 의과 대학에서 1학년과 2 학년이 지나는 동안 20%의 학생이 퇴교를 당합니다. 문제는 1년 다니다 퇴교를 다닐 때보다 2 년 다니다가 퇴교를 당하면 평생 다른 직업을 가지고 살면서 수십 만 불의 학자금을 갚아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그러한 학생이 미국 내에서 다시는 어느 의과대학에도 들어갈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과대학생들이 공부할 때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죽기 살기 식으로 공부에 전념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나의 건강, 우리의 건강을 위해서 지금도 일하시는 의료인들을 크게 존경하고 사랑합니다. 이상기 목사(평강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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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바람바람바람 최태호교수2022.07.31
    바람(風)과 바람(壁)과 바람   최태호(중부대학교 한국어학과 교수)  노래 중에 “그대 이름은 바람, 바람, 바람”이라는 가사가 있다. 오늘은 ‘바람’얘기나 해 볼까 한다. 흔히 동음이의어(同音異議語)라고 한다. 글자는 같은데 뜻이 전혀 다른 말을 일컫는다. 학교에서 수업시간에 어휘 게임을 하면서 동서남북의 순우리말이 무엇인지 맞추기를 하면 거의 맞추는 사람이 없다. 또한 벽(壁)의 순 우리말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역시 아는 학생이 없다. 그런데 ‘내로남불’의 뜻을 아느냐고 물으면 틀리는 사람이 없다. 그러면 ‘바람피다’가 맞는지, ‘바람피우다’가 맞는지 물으면 또 의견이 분분하다. 우리말은 이렇게 동음이의어가 많다. 한자의 영향도 있지만 우리말의 표현 방법이 다양함을 말해주는 좋은 예이기도 하다. 일단 시작했으니 우리말 동서남북부터 시작해 보자.   동풍을 우리말로 ‘샛바람’이라고 한다. 동쪽에 뜨는 새벽별도 ‘샛별’이라고 한다. 향가의 한 구절에 ‘새벌 밝은 달 아래’라고 하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새벌(서라벌)’이 동쪽 벌판을 말한다. 이런 단어들을 통해 우리는 동(東)의 순우리말이 ‘새’라는 것을 유추할 있다. 이어서 서풍은 ‘하늬바람(갈바람)’, 남풍은 ‘마파람’, 북풍은 ‘된바람’이라고 한다. 그러니 ‘갈마바람’이라고 하면 ‘남서풍’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된하늬바람은 ‘서북풍’이다. 이는 주로 뱃사람들이 사용하던 용어지만 우리말을 그대로 보여주는 좋은 예가 된다. 그러니 서쪽은 ‘하늬(갈)’, 남쪽은 ‘마(앞바람도 마파람이라고 한다. 주로 남쪽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북쪽은 ‘되’라고 한다. 우리가 흔히 중국사람을 ‘떼놈’이라고 부르는데, 이것은 잘못이다. ‘되놈’이라고 해야 한다. 일사후퇴 때 중국에서 떼로 몰려왔다고 해서 떼놈이라고 한다는 민간어원설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아니고 북쪽에서 온 사람이라고 해서 ‘되놈’이라고 했는데 발음이 강해져서 ‘떼놈’이라고 이르게 된 것이다. 과거에 ‘놈’은 사람을 가리키는 보통명사였다. 훈민정음에 “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놈이 많구나.”라는 구절이 있는데, 여기서 ‘놈’은 보통사람을 일컫는 말이다. 그래서 북풍은 순우리말로 ‘된바람’이고 북쪽에서 온 사람은 ‘되놈’이다. 이 바람(풍(風)을 막아주는 벽도 우리말로 ‘바람(ᄇᆞᄅᆞᆷ)’이다. 그런데 사람들에게 벽의 우리말이 무엇인지 물어보면 이상한 대답만 한다. 그러다가 ‘베람빡’이라고 하면 대충 눈치를 챈다. 경상도나 함경도에서는 ‘벨빡, 베루빡’이라고 하고, 연변의 조선족들은 ‘바람벽’이라고 한다. 이것은 ‘바람 壁’을 붙여서 발음한 것에 불과하다. “역전앞에서 만나자.”고 할 때 전(前)과 ‘앞’을 동시에 쓴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바람’이라고 하면 되는데 벽(壁)을 같이 발음한 것이고, 이것이 다시 변하여 ‘바람벽>베람박> 베루빡’과 같이 굳어져 마치 순우리말처럼 들리게 되었다. 그러니 벽의 순우리말은 ‘바람’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제 이 ‘바람’은 사어(死語)가 되어가고 있다. 일부지방의 방언으로만 존재할 따름이다. 원래 여기서 ‘발암(바람)’이라고 할 때 ‘발’은 ‘흙’의 뜻이다. 과거에는 주로 벽을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위에서 말한 ‘벌’(벌판), 그리고 ‘밭(田)’과 같은 어원을 지니고 있다. 끝으로 요즘 유행하는 ‘바람’이 있다. 누구나 알고 있는 “내가 하면 로맨스요, 남이 하면 불륜”이라고 하는 그 ‘바람’이다. 이 바람은 ‘피는 것’인가 ‘피우는 것’인가? 독자들도 잠깐 헷갈릴 것이다. “꽃이 피다”라는 문장과 “꽃을 피우다”라는 문장을 비교하면 쉽다. 이 문장들을 비교해서 “꽃을 피다”라고 하면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한 것을 알 수 있다. 즉 ‘(꽃이)피다’라는 단어는 목적어를 취하면 이상하게 보인다. 그러나 “소란을 피우다”라는 문장을 보면 자연스러움을 느낄 수 있다. 이런 것을 자동사와 타동사라고 한다. 목적어를 필요로 하는 동사가 타동사이다. 그러므로 로맨스든 불륜이든 간에 ‘바람 피는 것’이 아니라 ‘바람을 피우는 것’이다.(손진호, <지금 우리말글>) 세상의 모든 일은 시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올바른 세계관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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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매주 주기도문과 사도신경 암송하면 좋은 점 미주교회신보2022.07.11
    기독교 신앙인들은 매주 예배 때 주기도문과 사도신경을 암송한다. 가톨릭교회는 더 많은 기도문들이 있다.불교 신자들도 반야심경을 비롯해 많은 경문을 암송한다. 지식으로 따진다면 한두 번 읽고 설명을 듣는 걸로 충분하겠지만, 반복해서 외우므로 생활 속에 각인시키고 기억함으로 삶의 기준이 되게 하는 것이다.이런 종교적 신조뿐 아니다. 성현들의 명언(가르침)을 외우는 것도 삶을 올바르고 풍요롭게 만드는 묘약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에 3.1 운동의 독립선언서나 정비석의 '산정무한' 민태원의 '청춘예찬' 등을 외웠던 기억이 난다.어떤 이는 영어 공부(회화)의 방법으로 중·고등학교 때 영어 교과서를 달달 외우라고 가르치는 이도 있다. 이제 종교적인 신조(신경)처럼 유명인들의 명문들을 외워보는 것도 좋겠다. ① 아일랜드 켈트족의 축복기도문을 외워보자. "당신의 손에 언제나 할 일이 있기를 / 당신의 지갑에 언제나 한두 개의 동전(잔돈)이 남아있기를 / 당신의 발 앞에 언제나 길이 나타나기를 / 바람은 언제나 당신의 등 뒤에서 불고 당신의 얼굴에는 태양(해)이 비치기를 / 이따금 당신의 길에 비가 내리더라도 곧 무지개가 뜨기를 / 불행에서는 가난하고 축복에서는 부자가 되기를 / 적을 만드는 데에는 느리고, 친구를 만드는 데에는 빠르기를 / 이웃은 당신을 존중하고, 불행은 당신을 아는 체도 하지 않기를 / 당신이 죽은 것을 악마가 알아차리기 30분 전에 당신은 이미 천국에 가 있기를 / 앞으로 겪을 가장 슬픈 날이 지금까지의 가장 행복한 날보다 더 나은 날이기를 / 그리고 하나님(神)이 항상 당신 곁에 있기를 ···(Always in your hands, I have something to do / Always in your wallet, one or two coins remain / Always in front of your feet, The length appears / The wind is always yours, Blowing back from behind / On your face, The sun shine / Sometimes on your way / Even it rains, Soon the rainbow will come / Poor in misery in the blessing, I become rich / It's slow to make enemies. It's fast to make friends / Your neighbors respect you / Misery does not know you / That you are dead, 30 minutes before the devil knows / Already you are in heaven! / The saddest day of my life. From the happiest day ever. / It will be a better day / And God is always there for you).② 티베트의 정신적 지도자 달라이 라마(1935-)의 기도문도 한 번 읽어보자. "사람을 만날 때마다 언제나 나 자신을 가장 미천한 사람으로 여기고,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상대방을 최고의 존재로 여기게 하소서. 나쁜 성격을 갖고 저와 고통에 억눌린 존재를 볼 때면 마치 귀한 보석을 발견한 것처럼 그들을 귀하게 여기게 하소서. 다른 사람이 시기심으로 나를 욕하고 비난하더라도, 기쁜 마음으로 나를 지게 하고 그들에게 승리를 주소서. 내가 큰 기대를 갖고 도와준 사람이 나를 심하게 해칠지라도 그를 최고의 스승으로 여기게 하소서. 그리고 나로 하여금 직접 또는 간접적으로 모든 존재에게 도움과 행복을 줄 수 있게 하소서. 남들이 알지 못하게 모든 존재의 불편함과 고통을 나로 하여금 떠맡게 하소서."성경에도 이 같은 내용의 명언이 있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말아라. 누가 네 오른쪽 뺨을 치거든 왼쪽 뺨마저 돌려대어라. 너를 걸어 고소하여 네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는 겉옷까지도 내주어라. 누가 너더러 억지로 오리를 가자고 하거든 십리(5리를 가주고 다시 또 5리를 더해서)를 같이 가주어라. 네게 달라는 사람에게 주고 네게 꾸려고 하는 사람을 물리치지 말아라"(마 5:39-42).(출처 기독일보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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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선지자가 왜 욕을 해! "정성구 박사(전 총신대·대신대 총장)" 미주교회신보2022.07.07
    최근 수년 전부터, 나는 매 주일 칼럼을 쓰고 있었다. 들리는 말로는 국내의 모든 교파의 교역자들과 평신도들 그리고 선교사들과 해외동포를 합하면 적어도 10만여 명이 필자의 글을 읽고 있다고 들었다. 그리고 이 글들이 묶어져서 <목사가 왜 욕을 해>, <목사가 왜 정치를 해>라는 책이 출판되어 인기리에 팔리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3년 동안 한 주일도 빠짐없이 매주 칼럼을 쓰는 것은 여간 부담되는 것도 아니고, 소재의 한계도 있고, 정권과 교권을 동시에 깨우는 것에 독자들의 감동을 일으키는 것은 그리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어떤 때는 밤잠을 자지 못하고, 밤을 꼬박 세우면서 화제를 생각하다 보면 새벽 2~5시까지 집필을 하였다. 읽는 분들은 편안한 마음으로 읽고 댓글을 달기도 하고 감사하기도 하지만, 내 입장에서 보면 한 주제를 가지고 사투를 벌이는 것이 보통이었다. 나는 지금도 첫잠에서 깨어나서 새벽 1시에 이 글을 쓰고 있다. 왜냐하면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이자, 신약의 순교자요, 예수 그리스도의 전령자로서 길을 닦는 선지자 세례요한의 거침없는 욕설, 차마 입에 담기도 민망한 그의 욕설 때문이다. 일반인의 인식은 목사와 장로는 욕을 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라는 별명을 가진 이스라엘의 마지막 선지자인 세례요한은, 거친 야생마처럼 당시의 종교와 정치의 지배층과 특권계급을 향해서 듣기에도 섬뜩한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욕을 퍼부었다.그렇다면 선지자 요한은 왜 이런 욕을 했을까? 선지자라면 좀 스마트하게, 표준말로 사람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또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주어야겠지만, 나실인인 세례요한은 거침이 없었다. 나실인은 본래가 여호와의 참 종교의 순수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온전히 헌신하고, 독주를 마시지 않고, 시체에 손을 대지 않고, 머리털과 수염을 깎지 않는다. 또한 나실인은 하나님 중심의 삶을 살고, 절제와 순종을 삶의 원리로 살아간다. 그런데 선지자 세례요한은 나라 빼앗긴 가난한 백성들에게 좀 더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를 전하지 않고, 간담이 서늘하고, 불쾌하고, 입에 담지 못한 욕을 당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정치 지도자들에게 무차별 퍼부었다.세례요한의 본래 사명은 광야의 소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닦는 자의 사명을 받았다. 때문에 그는 불도저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언덕을 깎고, 골짜기는 메꾸고, 돌덩이는 골라내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장차 이룩하실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전위대였다. 당시 사람들 특히 바리새파 사람들은 종교인이었지만, 성경적 신앙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그들은 기득권 사수, 스팩, 혈통, 역사적 관습, 전통을 지키고 화석처럼 굳어있는 종교 행위를 신앙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 그들의 속은 예수님이 말씀한 데로 썩어 냄새가 났다. 한마디로 겉만 화려하게 횟가루를 발라놓은 무덤같은 종교였다. 또한 사두개인들은 정치가들로서 내세도, 천사도 믿지 않으면서 제사장직을 독점하고 있었고, 유대 최고법정인 산헤드린 공회를 완전 장악하고 있었던 철두철미한 세속인들이었다. 이 자(者)들의 생각에 자기들은 뼛속까지 아브라함의 자손이고, 유대교의 교육을 확실히 받고, 토라를 외우고 있으니 구원은 이미 얻은 것이나 다름없다고, 자기들만이 아브라함의 자손으로서 특권을 누릴 자격이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었다.그런데 이 자(者)들을 향해 <독자의 자식들!>이라는 세례요한의 폭탄적 메시지는, 당시 정치 집단과, 종교 집단을 향한 엄청난 욕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욕을 해도 좀 비유적으로 점잖게 할 수가 없는지? 선지자답게 권고와 위로와 평강을 줄 수 없는지?'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래서 세례요한이 좋은 말로 이렇게 말했으면 어떨까? 마치 교황이 말하듯, "여러분 행복하세요!", "서로 용서하고 평화를 말하시오!" 등등... 분명 좋은 말이다. 오늘의 목사님들도 좋은 말을 많이 한다. "인간은 마음먹기에 따라 달라진다", "자존심과 자긍심을 가지세요!",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세요" 등등... 분명 이 또한 좋은 말이다. 하지만 이런 말은 성경도 아니고, 복음도 아니다. 만약 요즘 세례요한처럼 불같은 메시지를 전하는 목사가 있다면, 그는 교회에서 즉시 쫓겨날 것이고, 이단으로 소송이 제기될 것이다.그런데 세례요한은 선지자의 소명과 사명자로서, 생명 걸고 "독사의 자식들아! 회개하지 않으면 멸망 받는다!"고 피맺힌 열정으로 절규하며 고함쳤다. 왜 절규하며 욕을 했는가? 혈통과 스팩과 전통에 단단히 굳어진 돌맹이처럼 희망 없는 자들에게는, 부서지고 가루가 되는 <회개>의 과정이 있어야 복을 받고, 비로소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기 때문이다. 때문에 선지자 세례요한이 거친 광야에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대놓고 직사포로 욕을 한 것은, 결국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타는듯한 애정이 있었기 때문이다.세례요한은 그들에게 "하나님은 돌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할 수 있다"고 전했다. 즉 돌처럼 굳어지고 이스라엘 광야에서 굴러다니는 돌맹이처럼, 천한 것을 가지고도 하나님의 권능으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으로 무능하고 타락한 인간은 자기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능>으로, <하나님의 은총>으로 가능하다는 복음을 제시했던 것이다. 때문에 세례요한의 메시지는 바울의 신학과 다르지 않다. 세례요한은 바로 그 당시 종교개혁자이다.선지자 세례요한! 그는 그냥 거친 욕쟁이가 아니고, 돌덩이 같은 인간을 갖고도 하나님의 택한 백성을 만들 수 있다는 오직 하나님의 은총(Sola Gratia)의 복음을 증거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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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학] 나 주님의 기쁨 되기 원하네! "신성욱 교수" 미주교회신보2022.07.07
    [1] 인간은 선과 악 중에서 무얼 선택할까? 성경적으로 말하면 악을 택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럼 왜 악을 즐겨 택하는 걸까? 그건 루터의 말처럼 인간 안에 '구부러진 마음'(죄)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자신에게 손해가 되거나 위험이 초래될 거 같은 상황에선 선을 알면서도 행하지 못하고 침묵을 지키는 이들이 참 많다. 소극적인 죄를 짓는 셈이다. 하지만 누구나가 다 그런 것은 아니다.[2] 가끔씩 이것을 반전시키는 예외적인 사건이 발생해서 보는 이로 하여금 감동을 주기도 한다. 전철 안에서 나이 어린 사람이 노인들에게 행하는 막말이나 볼썽사나운 행동이 담긴 영상을 접할 때가 종종 있다. 어느 날 지하철에서 중학생처럼 되어 보이는 남자 아이가 할아버지에게 욕을 하면서 마구 때리는 영상이 올라왔다. 주변에 있는 누구도 개입하지 않고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나는 분노가 치밀었다.[3] '아, 내가 저 자리에 있었으면...'하는 생각이 물밀 듯 몰려왔다. 바로 그때 영웅이 나타났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한 청년이 다가와서는 그 남학생을 꾸짖으며 할아버지가 맞지 않도록 온 몸으로 막아준다.그래도 해결의 기미가 없자 청년은 할아버지를 모시고 다음 정거장에 같이 내렸다. 그 광경을 영상으로 찍으면서 같이 내리던 한 사람이 청년에게 묻는다.[4] 어떻게 그런 용기를 낼 수 있었느냐고? 그때 청년은 울면서 이렇게 대답했다.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생각나서요!" 골치 아픈 일에 끼어들고 싶지 않아서 아무도 나서지 않았으나, 그 청년은 유일하게 할아버지가 젊은 애한테 당하는 걸 막아주었다. 이유는 뭘까? 자기 할아버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이와 흡사한 충격적인 실화가 하나 있다.[5] 2015년 7월, 과테말라에서 일어난 일이다. 열두 살 소년이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리엘 에스칼란테 페레즈이다. 그는 수업 후 집으로 가던 스쿨버스가 갱단에게 납치되는 사건을 겪는다. 갱단 조직원은 그에게 권총을 주며 버스 기사를 쏘면 살려 주고 안 쏘면 너를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하지만 소년은 끝내 총을 쏘지 않았다.화가 난 갱들은 다리로 가서 그를 던져 버렸다.[6] 135미터 높이의 다리였다. 그는 사흘 뒤 온몸이 부서진 채 발견되었지만, 기적같이 숨은 붙어 있었다. 아리엘은 소식을 듣고 찾아온 아버지를 꼭 껴안는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15일 후 눈을 감고 말았다. 너무도 가슴 아픈 일이다.아리엘은 갱들의 위협을 거부하고 자신이 죽는 것을 선택했다. 이럴 경우 압도적인 다수는 제 목숨 살리려 버스 기사를 총으로 쏴 죽였을 것이다.[7] 과거 미국 유학 시절 대한민국을 온통 경악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던 '지존파 사건'이 떠오른다. 차를 타고 가는 사람들을 자기들이 만든 살인 아지트에 끌어와서 총으로 쏴 죽여서 불태우는 끔찍스런 일당들에게 한 부부가 잡혔다. 나중에 알고 보니 우리 학교 선배 교수가 다니던 교회의 신앙 좋은 부부였다. 살인마들은 거기 끌어온 처녀 한 사람에게 총을 주면서 그 부부를 죽이라고 했다.[8] 어찌 됐을까? 이 처녀는 자기가 살기 위해 두 눈을 꼭 감고 그 부부를 죽였다. 나중에 그녀가 몸이 아프다는 핑계로 살인마 한 명과 병원으로 가던 중 도피해서 경찰에 신고함으로 그들의 전모가 밝혀지긴 했다. 그랬다. 그런 위기의 상황에서 자기 목숨을 희생해서 남의 생명을 살려주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그런데 어째서 아리엘은 갱들의 지시를 따르지 않고 죽음을 선택했을까?[9] 아버지를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고 보니 자기 아버지도 버스 기사였다. 자신이 탄 버스의 기사가 아버지라 생각하니 쏠 수가 없었던 것이다.이게 바로 '감정이입'(感情移入, empathy)이 가져다주는 대단한 힘이다. '공감'(共感, symphony)의 힘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게 없었더라면 누구도 자신의 소중한 생명을 이름도 모르는 타인의 목숨과 바꾸는 바보짓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10] '생명경시'의 현상을 사회 전반에서 볼 수 있다. 이웃의 아픔과 고통이 외면되고 있는 현실을 자주 본다. 대상이 내가 싫어하고 혐오하는 이라면 더할 나위 없다.예수님께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남기신 이유가 뭘까? 제한되고 편협 된 이웃의 개념을 깨기 위해서이다. 피를 섞은 사마리아인이나 창녀나 죄수나 한센씨병 환자나 강도나 살인자나 일본 놈이나 주님 눈에는 모두가 자기 양들이다.[11] 부모나 형제나 가족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용서 못할 이가 없고, 사랑 못할 이가 없다. 적어도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면 자기 눈앞에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이들의 모습만이라도 자기 가족 중 한 사람과 동일시 할 줄 아는 관점이 필요하다. 다른 이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차별화 된 용기'는 그럴 때 발휘가 되는 것이다.빌 2:3~4절의 말씀대로 잘 살아서 우리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다.[12]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신성욱 교수(아신대 설교학) (출처 기독일보 원문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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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6.25 전쟁: 참상의 기억을 넘어 하나님의 도우심을 떠올리는 날로 미주교회신보2022.07.07
    6.25 전범, 김일성 스탈린 모택동구약 전도서에는 "곧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도 있고"(전 8:14) 라는 말씀이 있다. 잘 수긍하기 어렵고 쉽게 헤아리기 어려운 내용이다. 전도서 기자는 17절에는 지혜자라도 능히 알지 못한다고 일괄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에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기 어려운 일들이 다반사다. 우리 각자의 인생 가운데서도, 이 민족의 역사 가운데도 말이다. 그 중에 72년 전, 오늘 일어난 6.25사변이 그렇다. 이 전쟁은 '악인들의 행위에 따라 벌을 받는 의인들'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것 같다.악인들인 북한의 김일성, 소련의 스탈린, 중공의 모택동이 일으킨 이 전쟁으로 무고한 백성들이 죽어갔다. 남북한 군인, 민간이 다 합쳐 약 380여만 명이 사망에 이르렀다. 이 수치는 당시 인구가 3천만이었으니 12%를 넘어선다. 6.25 전범하면 우리는 김일성만 떠올리는데, 스탈린이 전쟁을 승인했고, 모택동은 전쟁 전에 이미 엄청난 병력을 지원했다. 우리는 대부분 역습과정에서 유엔군이 인천상륙작전(9.15) 이후, 서울수복(9.28)하고 북진해서 압록강에 다다를 때 수십만의 중공군이 인해전술(人海戰術)로 쳐내려온 것만 기억하는데, 이미 모택동은 중국대륙에서 벌어진 국공내전에 전투경험이 있는 조선족 병사들 중, 3만 9천여 명을 전쟁이 나기 전인 1949년 7월부터 북한지역에 파견했었다.김일성이 남침을 개시할 때 북한병력이 총 20만이었는데, 그중 4만여 명이 조선족 병력이었다. 그리고 각 사단을 지휘했던 장성들도 대부분이 조선족들이었다. 1사단장 최공, 2사단장 이청송, 4사단장 이권무, 5사단장 김창덕, 6사단장 방호산, 7사단장 전우 등 10개 사단 중에 6개 사단의 지휘관이 조선족 장성들이었다. 이처럼, 중공도 전쟁 전부터 깊이 개입했고 모택동도 6.25사변의 전범 중 하나이다. 그런데, 지난 정부시기, 문재인 대통령을 비롯해 다수의 여권의 유력 정치인들이 공산당 창건 기념일을 경축하는 축전 및 축하 메세지를 보냈었다. 너무나 비정상적으로 돌아가던 시기였다. 이때 중국의 시진핑은 6.25 전쟁을 "제국주의 침략자에 대한 정의로운 전쟁이었다"라고 선언했었다. 그런데, 항의는 고사하고 장단을 맞추었으니 어찌 역사 앞에 죄인이라 하지 않을 수 있는가. 다행이도 안보를 국시로 하는 새 정부가 들어섰고 이번(24일)에 6.25 참전 용사들을 초청하여 극진히 대접하며 "대한민국의 오늘을 있게 한 영웅들"이라고 존경을 표한 것을 보면서 내심 안심을 놓게 되었다.전쟁 전, 하나님의 경고와 참회기도 1950년 6월 25일 전쟁이 터지고 남한 땅에 죽음의 공포가 휘몰아칠 때 많은 기독교인들은 왜 전쟁이 일어났지, 왜 하나님은 전쟁을 막아주지 않으셨을까? 라는 질문을 하면서 목회자들을 중심으로 회개운동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중에 하나가 이미 전운이 감돌았었고 경고의 메시지가 강력하게 선포되었지만 귀를 기울이지 않고 방심을 했던 것이다. 전쟁이 터지기전 남한내에는 제주4.3사건(1948.4.3.), 여수·순천사건(1948.10.19.) 등 전국적으로 좌익들의 준동이 극에 달했었고 심각성을 감지한 한경직 목사님을 비롯한 교계 지도자들이 전국적인 순회 집회를 진행하며 공산주의에 대한 위험성을 설파했었다. 이것이 바로 요나를 통해, 니느웨 도성에 회개를 촉구했던 하나님의 경고의 메시지였던 것이다. 니느웨 모든 백성은 재를 뒤집어쓰고 회개했지만, 남한 백성들은 그러지 못했다.결국, 전쟁은 터졌고 그때서야 목회자들은 피난 가는 지역마다 간이교회를 세워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고 회개의 기도를 하늘로 올리기 시작했다. 북한군이 낙동강 전선까지 쳐내려오고 이제 부산지역만 남는 풍전등화 속에 회개의 기도는 울부짖음이 되었다. 부산지역 교회 및 여러 공공장소에 운집한 수많은 성도와 목회자들은 피눈물의 회개를 올렸다. 초량교회에는 한상동, 박형룡, 박윤선 목사를 비롯해서 약 250여명의 목회자들이 모였고 8월 말에서 9월 중순까지 2주 동안 국난 극복을 위한 구국기도회를 열었다. 이때 일제 치하 때 벌어졌던 신사참배, 우상숭배의 죄를 뜨겁게 참회하였다고 한다. 그렇게 뜨겁게 회개의 기도가 하늘로 올려지고 난 3일 후에 성공확률이 5000분의 1밖에 안 되는 인천상륙작전(9.15)이 성공하게 된 것이다. 서울을 수복한 맥아더 장군은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였고 하나님의 도우심이었다고 증언했다고 한다.6.25 전쟁, 참상기억을 넘어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기념하는 날로6.25는 민족사에 더 이상 있어서는 안될 너무나도 끔찍하고 비극적인 전쟁이었다. 그 참상은 이루말할 수 없으며 우리는 6.25를 맞을 때마다 그 아픔을 절대 잊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고 비극만 떠올리며 아파만 해서는 안될 것이다. 악을 선으로 바꾸신 하나님의 역사를 되짚어 보며, 통일의 소망을 품는 시기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 6.25전쟁 가운데도 역사하신 하나님은 전후에도 이 민족 가운데 강력하게 개입해주셨다. 모든 백성으로 하여금 공산주의의 허상을 경험케 하심으로 자유민주주의 소중함을 철저히 깨닫게 하셨고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1953.10.1.)을 통한 굳건한 한미동맹으로 안보를 튼튼히 해주셨다. 시장경제시스템을 구축케 하셔서 미국으로부터 경제원조를 받게 함으로 빠른 전후복구사업을 통해 이 나라를 다시금 일으켜 주셨다. 그리고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하셨다. 자유민주주의 가치를 훼손하는 지난 정부로 인해 다시금 위기를 맞았지만, 다시금 자유를 강력히 외치는 지도자를 세워주심으로 우리의 눈물을 닦아주신 하나님이시다. 6.25를 기념하는 이날, 전국 곳곳에서 나라의 안녕을 위해, 통일을 위해 기도하는 수많은 이들의 모습들에서 향후, 하나님의 역사하실 일들을 기대해 본다. (출처 기독일보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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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칼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잘 될 것이요 "김병렬 목사, 찬양교회" 미주교회신보2022.07.07
    [전]8:12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 또한 내가 아노니 하나님을 경외하여 그를 경외하는 자들은 잘 될 것이요[전]8:13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 그 날이 그림자와 같으리니 이는 하나님을 경외하지 아니함이니라12절은 죄인이 백 번 악을 행하고도 장수한다는 말로써 현실적으로 악에 대한 심판이 속히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도 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여기서 ‘백 번’이라는 말은 ‘무수히 많다’는 의미입니다. 즉 악인들이 악행을 무수히 저지르고 있음을 나타낸 것입니다. 그리고 ‘악을 행하다’라는 동사가 분사형으로 되어 있는데, 이것은 악인들이 과거에 수 없이 많은 악을 행했으며 지금도 여전히 악을 행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많은 악을 계속해서 범하는 자에게 임하는 것은 심판이 아니라 장수입니다. 성경에서 장수는 일반적으로 선한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실에서는 악인이 장수하는 납득하기 어려운 상황이 벌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반절에서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가 잘될 것이라고 선언합니다. 이는 악인들이 현실 가운데 흥왕하는 것을 부정하는 것은 아닙니다. 현실에서는 악인이 흥왕할 수도 있으나 궁극적으로 잘되는 자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라는 뜻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본문은 종말론적 심판을 염두에 둔 표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어서 13절에서는 악인의 종말론적 심판을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악인은 잘 되지 못하며 장수하지 못하고’라는 선언은, 앞서 12절에 나온 ‘죄인은 백 번이나 악을 행하고도 장수하거니와’라는 내용과 서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는 결코 모순이 아닙니다. 12절은 현상적인 측면을 말한 것인 데 반해 13절은 종말론적 실상을 나타낸 표현이기 때문입니다.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는 악인이 악을 행하면서도 장수를 누리는 부조리가 분명 존재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비록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이나 징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때와는 달리 지체된다 할지라도 최종적으로 악인에게는 무서운 형벌이 임하게 됩니다. 그래서 악인이 아무리 장수한다 하더라도 그의 삶은 결국 그림자와 같은 것입니다. 이 때 ‘그림자’라는 것은 허무하고 헛된 것을 가리킵니다. 이처럼 악인의 삶이 헛되고 잘 되지 못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을 경외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의 인생이 잘 될 수 있는 비결을 알려 주십니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경외’라는 말은, 하나님의 위대하심을 깨닫고 그로 인해 느끼게 되는 하나님에 대한 인격적 두려움과 존경의 마음을 말합니다. 인간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며 또한 영혼을 멸하실 수 있는 심판자이신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존경한다면 당연히 죄와는 멀어질 것이며,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복 주시며 잘 되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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