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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계뉴스] [최선 박사 칼럼] 심장병 환우 5,000명에게 희망을 전한 밀알심장재단 미주교회신보2024.11.08
    [삼백만부흥운동본부 총재 최선 박사]   고준(5세) 어린이는 심장 질환을 가지고 태어났다. 작은 몸으로 아픔을 겪던 준이는 1차 수술을 받았지만 얼마 안 되서 재발하여 더 많은 고통의 시간들을 보냈다. 그러던 중 밀알심장재단을 만나게 되면서 2차 수술을 받을 수 있었다. 아산병원에서 5-6시간에 걸친 대수술이었다. 준이는 의료진의 배려와 사랑으로 중환자실에서 잘 견뎌내었고 일반 병동으로 올라와 퇴원을 앞두고 있다.준이는 밀알심장재단의 5,000번째 수술의 주인공이었다. 그 어린이가 속히 회복되어서 자유로운 일상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한다. 하나님이 준이에게 건강과 지혜를 주시고 앞으로 교회와 사회 그리고 국가에 크게 이바지 하는 인물이 되기를 기대한다.이처럼 밀알심장재단은 준이와 같은 국내 아동들뿐만 아니라 해외 25개국 심장병 환자들을 돌보며 심장수술을 통하여 새 생명을 선물 하였다. 해외 빈곤 가정의 부모들은 생활의 어려움 때문에 아이의 수술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질병을 가지고 있는 아동을 우리나라로 초청하여 그들에게 새 희망을 주고 있다.이정재 목사는 주)대우에 근무할 당시 낙상사고로 큰 시련을 겪었다. 1980년대 초에 미국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면서 심장병 어린이 2명을 미국으로 데려가 수술을 시켜 그들의 미래를 밝게 하였다. 왜 우리나라는 심장병 환우들을 수술하고 돕는 단체가 없을까 라면서 “한국교회에 사랑이 있나요?”라고 외치며 그가 그 때 받은 치료비와 퇴직금을 모아서 1987년 1명의 심장병 환우의 수술을 지원하는 것이 밀알심장재단의 시작이 되었다. 이 땅에 소외되어 죽어가는 심장병 환자들을 위해 자신의 소중한 사재를 털어 밀알심장재단을 설립하였다. 그는 캄보디아 심장병 환우 400명의 수술을 지원하였으며 건강을 찾은 젊은이들이 꿈을 가지고 생활하는 모습에 보람 있다고 고백한다.밀알심장재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심장으로 너희 무리를 얼마나 사모하는지 하나님이 내 증인이시니라.” (빌 1:8) 이라는 말씀을 실천하면서 우리나라를 비롯하여 중국, 인도, 몽골, 캄보디아, 베트남, 필리핀, 미얀마, 라오스, 인도네시아, 코소보, 키르기스스탄, 스리랑카, 이집트, 이라크, 아프리카 등 전 세계 25개국의 어려운 심장병 환자 5,000여명에게 새 생명을 전하였다.밀알심장재단은 2015년 UN 글로벌 컴팩트에 가입된 국제구호개발 NGO로 가입이 되었다. ‘전 세계의 심장을 뛰게 하라’는 비전으로 심장병 환자 수술비 및 장학금 지원, 집짓기, 무료진료 등의 사역을 하고 있다. 지구촌의 어린이들이 심장병으로 고통을 받는 현실이 안타까워 이들에게 수술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장학금을 보내고 있으며 자국의 지도자로 우뚝 세워지기 위하여 물신양면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고 다양한 도움의 손길을 전해 주고 있다.밀알심장재단은 전 세계 어려운 심장병 환우에게 수술비지원을 통하여 새 생명을 전하고자 한다. 그리고 수술 받은 아이들에게 장학금 지원으로 꿈과 희망을 전한다. 수술 받은 가정에게  사랑의 집짓기로 행복과 웃음을 전하고자 한다. 질병으로 학업을 중단한 환우들에게 스스로 자립할 수 있도록 기술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여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꿈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심장병으로 학업을 포기했던 아이들이 배움을 이어갈 수 있도록 밀알 학교를 설립하고 미래의 꿈을 펼치도록 돕고자 한다. 수술 받은 모든 심장병 환자들이 마음껏 뛰놀고 배우며 자국의 각 분야에서 위대한 지도자가 될 수 있도록 양성하고자 하는 비전을 가지고 지구촌 심장병 환우들을 섬기는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이 비전과 꿈을 이루기 위하여 총회를 중심으로 세계로부천교회는 전 세계 심장병 환우를 돕는 밀알심장재단과 함께하는 출범식을 가졌다. 협력교회의 활동은 1. 생활이 어려운 심장병 수술비 지원 2. 홍보 3. 선교하고 나누는 교회 4. 협력교회 후원 5. 선교지 수술 6. 사랑의 음악회 7. 수술자를 위한 기도 등이다.한 생명을 살리는 소중한 사역은 계속되어야 한다. 이 소중한 사역을 위해 애쓰고 있는 밀알심장재단을 응원하고 기도한다. 전 세계의 심장을 뛰게 하는 밀알심장재단과 함께하는 섬김이 지역과 해외에서 아름다운 열매가 풍성하게 맺어지기를 기원한다. 독자들도 세상에 빛과 소금의 사명을 감당하기를 소망한다.   최선 박사(Ph.D., Th.D.)삼백만부흥운동본부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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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계뉴스] [최선 박사 칼럼] 스위스 개혁파의 교훈 미주교회신보2024.09.26
    로마가톨릭의 반성경적인 교황중심이 최고조를 이루었던 당시 유럽은 정치적, 종교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금도를 벗어나 타락의 길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시점에 스위스 출신의 종교개혁자가 태어나게 된다. 그가 바로 울리히 츠빙글리(Ulrich Zwingli, 1484~1531)이다. 그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와 동시대 사람으로 스위스 취리히를 중심으로 종교개혁을 일으킨 위대한 개혁자이다.금년은 종교개혁 507주년을 맞이하는 해이다. 그러나 기독교가 시대의 흐름 속에서 다양한 도전을 받고 있으며 영적으로 크게 흔들리고 있다. 그동안 역사적으로 중시했던 전통의 가치들이 폄하되어지고 있으며 오히려 동성애와 차별금지법 제정 준비로 인한 역차별을 받아 교회와 신앙의 기둥들이 심각하게 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처럼 안타까운 시점에 우리는 종교개혁의 달을 맞이하였다. 그래서 오늘은 특별히 츠빙글리에 관하여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종교개혁자들의 진정한 의미를 본받아 이 시대에 필요한 가치와 바른 교훈을 삼아 삶의 자리에서 열매를 맺고자 한다.1484년 1월 1일 스위스 토겐부르크 자치주 빌트하우스(Wildhaus)에서 출생한 츠빙글리는 1498년 비엔나로 유학하면서 철학에 관심을 가지고 심도 있게 연구하였다. 그는 1502년 스위스 바젤에서 당시 최고의 철학자이자 신학자 에라스무스의 사상에 심취하여 큰 영향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아 1506년 사재 콘스탄스 서품을 받았으나 신학과 철학을 공부하면서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그가 교회에 관한 심각한 문제점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부정과 부패의 부당함을 체험하였다.급기야는 아인지이델른 수도원에서 가톨릭 공로사상 선행에 의한 구원교리에 대하여 강력하게 비판하였다. 성경을 읽고 연구하는 그가 교회가 주장하는 교리에 대하여 반기를 들었다는 것은 당시에는 획기적인 사건으로 번지게 되었다. 그리고 성경에 입각한 사역을 하기로 다짐하게 된다. 그리하여 1519년 스위스 취리히에서 목회를 하며 성도들에게 로마가톨릭에 대하여 강력하게 저항할 것을 선포하였다. 츠빙글리가 가는 곳곳마다 개혁의 물결이 강하게 흐르고 있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1531년 10월 갑펠에서 있었던 가톨릭 연맹과의 치열한 싸움으로 장열하게 전사하게 된다.츠빙글리가 스위스 취리히 종교개혁을 단행하면서 무엇보다 교회개혁을 위한 공개토론을 강조하였다. 사적인 것이 아닌 공적인 자리를 만들어서 진정한 복음의 진리를 깨닫는 방법을 제시하였다. 마틴 루터가 개인적 번민과 복음적 진리에 대한 고뇌의 결과로 깨달음을 주었다고 한다면, 츠빙글리는 현실 교회상에 대한 반성으로 깨달음이 주어진다는 논리를 전개하였다.그는 1519년에서 1556년에 이르기까지 신약강해를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로 설교하였다. 그리고 가톨릭 신앙적인 오류와 종교적 남용을 심도 있게 비판 하였다. 또한 츠빙글리는 1521년 로마 교황의 용병요구에 거부 의사를 분명히 전달하였으며 용병 파병 반대 운동에 누구보다도 강력히 실천에 옮겼다. 1522년 4월에 이르러 사순절 날 고기금지에 대한 비난의 수의를 높이게 된다. 외형적이고 습관적인 신앙에 철저하게 반대하였다. 아울러 그는 소시지 사건을 맞이하게 된다. 사순절 첫날에 그와 동료들이 소시지를 먹었는데 사순절 기간에 육식금지 규정을 위반했다면서 논쟁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1523년 1월에 제1차 공개 토론회가 열렸는데, 그 자리에서 “67개 신조” 발표를 하였다. 츠빙글리는 성직자 결혼금지 제도를 어기고 결혼을 하였다. 그리고 오직 성경만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명확하게 주장하였다.1차 토론이 1523년 1월 29일에 있었다. 67개조 논재 중에 루터의 95개조 논제와 비슷하였다. 격렬하게 안건을 걸고 토론하였고 시의회에서 통과 되었다. 예배 의식의 근본적 개혁을 단행한 것으로 교회 정치의 주권은 교회에 있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재확인한 것이다. 1523년 10월 26일부터 29일까지 있었던 2차 토론은 성상을 더 이상 교회 안으로 가져오지 않으며 이미 있는 성상만 일부 허용한다는 것이었다. 3차 토론은 1524년 1월 19일에서 20일까지 있었다. 미사는 인정되나 성상을 폐지하라는 것이다. 그것으로 인하여 재세례파와 결별하는 원인이 되었다. 결과적으로 4월 16일이 개혁교회 최초 복음적 성찬예식을 거행하게 되는 역사적인 날로 기록에 남아 있다.구체적인 교회의 갱신 내용은 다음과 같다. 미사의 폐지를 단행해야 한다. 성경에 입각한 설교를 해야 한다. 성상의 금지를 선포한다. 규칙적인 빈민구제를 실시한다. 윤락 매춘을 폐지한다. 그리고 사역자들을 배출할 신학교 설립을 한다.1529년에 있었던 가톨릭 제후들의 기독교연합과 복음적인 스위스 사이의 무장투쟁은 치열한 결과를 낳게 되었다. 제1·2차의 카펠 전쟁과 스위스의 종파분열을 야기했다는 것이다. 츠빙글리는 1531년 로마 가톨릭 교도와의 제2차 카펠 전쟁에서 싸우다가 47세의 나이로 종군목사로서 최후를 맞이했다. 스위스 취리히 개혁운동은 후계자 하인리히 불링거(Heinrich Bullinger, 1504∼1575)로 전수되게 되었다. 개혁교회의 신앙고백서의 태동은 『제1 헬베틱 신앙고백서』 그리고 취리히 합의서 작성에 있다. 그 합의서에 서명한 개신교인들을 역사적으로 개혁파라고 부른다.스위스 개혁파의 주요 업적과 신학은 츠빙글리와 개혁파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츠빙글리와 루터는 1529년 독일 마르부르크(Marburg)에서 열린 성찬논쟁에서 결별하게 되었다. 왜냐하면 츠빙글리는 성찬의 제정어인 "이것은 내 몸이요, 이것은 내 피다"라는 것을 상징적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루터는 문자 그대로 떡이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했으며 포도주에 그리스도의 피가 실재한다는 공재설을 주장하였다. 이처럼 각기 자신들의 개혁의 길을 가게 되었고 결국 회담은 결렬로 이어졌다.루터파는 공재설, 가톨릭교회의 예전 일부 유지, 강단의 십자가, 촛불, 제등을 앞세우는 의식을 표명했던 반면에 츠빙글리 개혁파는 기념설, 가톨릭교회의 모든 잔재는 반드시 개혁되어야 하고 강단과 강단 밑의 성찬석 이외의 모든 장식을 금지한다는 것이다. 츠빙글리의 개혁 원리는 오직 성경, 오직 믿음, 오직 그리스도를 확고히 주장하였다. 츠빙글리의 저서로는 "음식의 선택과 자유"(1522), "결론의 해석과 근거들", "참 종교와 거짓종교에 대한 해설"(1525) 등이 있다.종교개혁의 달을 맞아 역사적인 스위스 개혁파의 발생과 그들이 주장했던 핵심들을 살펴보았다. 무엇보다 이 시대에 반기독교적인 환경이 조성되는 상황에서는 영원한 진리가 되는 성경, 구원의 핵심인 믿음, 우리가 땅 끝까지 증거 해야 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결코 놓치지 말아야한다.우리는 부흥의 시대를 지나 마이너스 성장으로 교회들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 국가적으로는 동성애, 차별금지법이 제정된다면 교회와 우리의 생활에서 영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심각하게 도전을 받게 될 것이 불을 보듯 명확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국교회 연합예배와 찬양 그리고 큰 기도회에 힘을 모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코로나19 기간 동안에 어느 기관들보다 정부로부터 핍박을 받았다. 한국교회만 몰아부처 성도들을 이탈하게 하였고 작은 교회들이 사라진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10월 27일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진행하는 광화문, 시청, 서울역에 참석을 하여 기독교의 분명한 목소리를 정치권에 전달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50년 만에 200만이라는 기독교인 대규모 집회가 있을 예정이다. 나하나 쯤이야 하는 안일한 인식을 버리고 스위스 종교개혁자 츠빙글리 개혁파의 후손으로써 주님의 몸 된 교회를 사랑하고 든든하게 세우는 연합예배에 적극적으로 동참하여 심각한 위기에 빠진 한국교회를 바르게 선도하고 세워가는 국내외 독자들이 되기를 바란다.[최선 박사(Ph.D., Th.D.) 삼백만부흥운동본부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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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계뉴스] 한국교회 연합예배 및 찬양 큰 기도회 개최 미주교회신보2024.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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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계뉴스] [최선 박사 칼럼] 거룩한 소원을 갖고 희망을 품자 미주교회신보2024.08.08
    [삼백만부흥운동본부 총재 최선 박사]  사회나 이웃의 도움 없이 홀로 자녀들을 키우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무척 어렵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상처로 혼란했던 그 때, 농촌에서 아무것도 없이 여성 홀로 가정 경제를 이끌어 간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그 어렵던 시절에 경남 김해로부터 더 들어가야 하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난 부산세계로교회 손현보 목사가 소명을 받고 영혼구원에 전력하는 삶 속에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하고자 한다.그는 경남 김해시 생림면 무척산(703M)기도원 (일제강점기에 고신측 한상동 목사를 비롯한 목회자, 성도, 애국지사들이 구국기도회를 하였던 장소) 아랫동네에서 태어났다. 부친이 일찍 세상을 떠났기에 아버지라 불러보지 못하고 자랐다. 그의 어머니는 아버지 둘째 부인으로 땅 한 평 없이 4명의 자녀들을 양육하기 위해 밤낮 없이 일손을 놓지 않았다.그럼에도 그의 가정의 경제적 빈곤은 해결되지 못했고 중학교 때에는 몇 백 명의 전교생들 중에 자신만이 검정 고무신을 신고 다녔을 정도였다. 새 학년이 되면 선생님에게 짝을 바꾸어 달라고 하는 말을 들으며 가난의 열등감 속에 학교를 다녔다.그렇지만 그는 미래에 대한 비전을 품으며 끈기를 가지고 학창시절을 보냈다. 너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아무것도 없는 그가 희망을 찾기란 불가능했다. “돈은 다 어디 갔나? 그 돈 먹어 보고 죽고 싶네”라는 어머니의 한탄이 날마다 이어졌다. 예수 믿기를 권고 받았지만 거부하였던 그가 중학교 3학년 때 마음 따뜻한 친구의 전도로 20여 명 정도 모이는 작은 교회에 다니기 시작하였다.“하나님! 제가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없이 살아왔는데, 이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니 참 감사합니다. 이제부터 제가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하겠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되겠습니다. 오직 주의 영광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인생을 전폭적으로 하나님께 맡겼다.중학교를 졸업한 손현보는 실업계 고교에 진학하였고 어머니의 일손을 도우며 진로를 위해 간절히 기도하였다. 새벽과 방과 후 시간을 내어 성경을 많이 읽고 교회를 섬기면서 자신의 신앙생활에 전력하였다. 특별히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소원을 품고 있으면 그것을 이루어 주신다.”라는 말씀을 의지하고 힘든 생활을 견디었다. 산 중턱에 있는 무척산기도원까지 기도원에 올라가는 사람들의 짐(반가마니의 쌀과 생활용품 등)을 지개로 옮겨 주며 모은 품을 용돈으로 사용하였다.그가 대학을 가기위해 원서를 낸 고신대학교에 합격은 하였는데, 워낙 가난한 집안에 등록금을 마련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걱정이 많으셨고 외삼촌은 “논 30마지기가 있어야 그 수익으로 공부를 하는데 논도 없는 네가 어떻게 대학교를 다니느냐?”며 핀잔하셨다. 그러나 그는 담대하게 “하나님은 살아계십니다. 분명히 제가 대학교를 졸업하도록 도와주실 것입니다.”라고 말했다.대학 입학금을 위해 매일 기도하는 중이었다. 부산 주례 삼거리 철길 위에 올라가면 불현사가 있는데 놀러오라고 했던 기억이나 절에 가서 승려를 만나 대화를 나눴다. 승려가 “어 자네 웬일인가?” 놀러오라고 해서 왔습니다. “그래 대학교에 들어간다고 했는데 어떻게 되었나?” 예 합격했습니다. “등록금은 준비했나?” 아직 못했습니다. “요즘 등록금은 얼마나 하나?” 입학금까지 60만원 가까이 합니다. “그래… 놀다가라” 네, 하고 그는 산속에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다. 찬송하며 뜨겁게 기도하고 내려오다 절에서 일하시는 아주머니를 만났는데, 승려를 만나고 가라 하였다.인사하는 현보에게 승려는 돈 봉투를 주시며 등록하라고 하셨다. 자신은 그 돈을 나중에 갚을 능력이 없다고 고사하였으나 “열심히 예수 믿어서 부처가 되면 되지”라고 하였다. 막상 고신대학교에 입학은 하였으나 숙식할 곳을 찾지 못해 다시 절로 갔다. 승려의 도움으로 1년 동안 불현사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통학을 했다는 손현보는 그 당시 도움을 주었던 승려를 참으로 고마워했다.일반적으로 청년들은 군대가 잃어버린 시간, 없어져야 하는 시간이라고 하지만 그는 “하나님의 영광과 뜻을 위하여 나를 사용하여 주옵소서” 라며 기도했다. 손현보 신학생은 신학대학교 12월 3일 전 날까지 학기말 고사를 치루고 군 입대를 하였다.논산육군훈련소에서 차출되어 701 특공대에 배치됐다. 그곳에서 교회에 간다고 하면 선임들이 구타하고 기압을 주었다. 그래도 그는 교회에 갔다. 후에는 입술과 머리가 터지고 다리가 절뚝거리는 상황에서도 교회에 갔다. 나중에는 하나 둘 전도하여 소대 전체가 복음화 되었고 부대장까지 예수 믿고 집사가 되는 축복을 받았다.그가 특공대에서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없었다. 태권도, 특공무술은 자신이 없었다. 하루는 장군, 중령 등의 지휘관이 입회하는 특공대 공수교육 행군이 있었다. 이 때 하나님이 자신을 이곳에 부르신 뜻을 발견하였다. 쓰러진 동료의 군장 25kg을 앞으로 메고 자신의 것은 뒤로 무장 한 채 최악의 상황에서도 완주하여 지휘관들이 기다리고 있는 최종지점까지 달려 1등을 하였다.손현보 목사는 특공부대 대장으로부터 특공모범상을 받았고 군부대에 도서관을 만들며 장병들의 정서와 교양을 위해 노력하였고 군 생활에서 소대 전체를 복음화하는 쾌거를 이룩하였다. 그는 매우 열악한 환경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였고 비전을 품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거룩한 소망을 가지고 살기로 작정하였다.시골마을에서 다섯 번의 교회 건축을 통해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예배당을 완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 그는 영혼구원과 생명을 살리는 소중한 사역 그리고 다음세대를 키우는 우남학교를 준비하면서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기둥 같은 인물을 양성하려는 비전을 가지고 있다. 사회 곳곳에 기독교 세계관으로 무장한 능력 있고 자유통일, 복음통일의 시대에 지도자들로 쓰임 받게 될 인물을 키우는 교육에도 비중 있게 매진하고 있다.우리는 지금까지 한 사람의 인생을 책임져 주시는 하나님의 멋진 역사를 목격하였다. 개개인의 삶의 여정은 다르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현실을 부정하고 원망하며 희망을 잃고 삶을 포기하기도 한다. 하지만 우리는 손현보 목사의 삶에서 보았듯이 예수 안에서 희망을 품자. 현재와 미래에 오직 주님을 기쁘시게 하겠다는 거룩한 소원을 가지고 현실은 매우 힘들고 어렵더라도 당당히 극복하며 살아가자.   최선 박사(Ph.D., Th.D.)세계로부천교회 위임목사삼백만부흥운동본부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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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계뉴스] [최성민 칼럼] 희생으로 다져진 눈물의 섬, 하와이 미주교회신보2024.08.02
    [2024견미단 '리틀 이승만' 견미단원 최성민][하와이 진주만기념공원][2024견미단 하와이 진주만기념공원 단원들과 함께][하와이 한인 칼라하 묘지 2024견미단원들과 함께]  미국 하와이 역사 탐방 3일차를 맞이하였다. 조식을 먹기 전에 하와이의 거리들을 보고 싶어서 조원과 같이 산책을 하였다. 길거리에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으나 많은 차량들이 통행을 하고 있었다. 숙소 근처에 있는 ‘Ala Moana Regional Park’해변으로 이동하였는데 정말 아름다웠다.오른쪽에는 고운 모래와 아름답게 지은 빌딩이 우리를 반겼고 왼편으로는 나무들과 새들이 반겼다. 다 해변으로 모였는지 많은 사람들이 수영을 하거나 스탠딩 패들보드를 타고 있었다. 우리는 숙소에 돌아와 다음 일정인 ‘진주만기념공원’으로 이동했다.이동하는 동안 창밖으로 하와이의 모습들을 관찰할 수 있었는데 조깅을 하는 사람이거나 홈리스들이 대부분 이였고 걸어서 이동하는 사람들은 거의 볼 수 없었다. 하와이가 화산섬이라 그런지 고속도로에 접어드니 왼쪽에는 산과 산 중턱에 지어진 주택들이 보였고, 오른쪽에는 항구와 해변, 그리고 드넓은 바다가 보였다.‘Pearl Harbor National Memorial’(진주만 국립 기념관)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기습공격으로 희생을 당한 미군과 12척의 함선을 추모하고 기념하는 유적지이다. 당시 가장 많은 승조원이 숨진 애리조나 호가 바다에 가라앉은 그대로 남아있으며 1945년 9월 2일 일본군이 항복 문서에 서명한 미주리호도 이곳에 전시되어 있다. 특히 우남 이승만 대통령은 진주만 공습 6개월 전에 일본이 미국을 공격한다는 책 <일본 내막기(Japan Inside Out)>을 출판한 바 있다.공원은 생각보다 넓었고 다 구경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여 바로 애리조나호가 가라앉아 있는 ‘USS Arizona Memorial’에 들어가기 위해 줄을 섰다. 이곳에는 현역 경찰과 군인들이 공원을 지키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찾아왔다. 배를 타고 5분정도 이동하였는데 중간 중간에 현역으로 운용되어지고 있는 군함들이 항구에 대기 중이었다.이곳은 일반적인 공원이 아니라 미군 군사시설구역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눈으로 많이 보고 기억에 담았다. 돌아오는 길에 퇴역한 미주리호와 USS 보우핀 잠수함을 멀리서 볼 수 있었는데 생각보다 매우 컸다. 그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이런 무기들을 만들었는지 신기했다.견학 후 어제 점심을 해결했던 ‘Waterfront Park’에서 점심을 먹었다. 오늘도 뜨겁고 강한 강풍이 불기 시작했다.우리나라 공원은 비둘기나 참새가 많이 보이는데 이곳은 특이하게도 앵무새와 닭과 병아리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작은 크기도 아니고 건강하게 생긴 닭이 울면서 돌아다니는데 잡아먹으면 맛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새들 중에 ‘앵그리버드’라는 게임 속 캐릭터들의 모습과 흡사하게 생긴 새를 많이 발견하여 눈과 입이 즐거운 시간을 가지게 되었다.다음 일정으로 초기 한인들의 묘지가 모여 있는 칼라하 묘지에 방문하였다. 우리 일행은 독립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 분들에게 감사의 헌화를 하였다. 최근에 발견되어 관리가 전혀 되지 않은 채 묘비가 넘어지고 글씨도 지워져있는 것도 보여 너무나 죄송했다.공동묘지를 나와 다이아몬드 헤드산 등반을 하였다. 이곳의 정보를 제대로 알지 못해 산책하는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분화구 정상까지 올라가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사람들과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마음으로 올라가기 시작했으나 뜨거운 날씨에 조금 움직였는데 땀이 송글송글 맺히기 시작했고 갈증이 심해졌다.그러나 조원들과 함께 즐겁게 올라가니 분화구 정상에 도착하였고 정상에서 보는 풍경은 잊을 수 없었다. 호놀룰루의 전경이 다 보였고 태평양의 깊은 바다도 보였으며 그림 같은 구름들도 볼 수 있었다. 사진을 아무리 예쁘게 찍으려고 해도 담을 수가 없었다.그러다가 문득 군복무를 하였던 백령도가 생각났다. 백령도에서 제일 높은 곳이 군사시설이면서 또한 나의 등반코스였는데 이곳과 비슷한 전경에 옛 기억을 떠올랐다.산을 내려가는 길에는 다른 조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서로 알아가는 시간을 가지고 마침 같은 백령도에서 군복무한 선임을 만나서 무척 반가웠다. 저녁 식사는 ‘서라벌’에서 김치찌개가 제공되었다. 오랜만에 국물이 들어가고 김치가 들어가니 느끼했던 입속을 청소해주었다.식사 후 ‘바른청년연합’ 대표 손영광 부단장의 ‘과학도 삼켜버린 PC주의의 허울’이라는 제목으로 특강을 들었다. 출발하기 전 ‘빌드업 클럽 세미나’를 들어서 그런지 더욱 이해하기 쉬웠고 이승만 박사의 대단한 통찰력과 우리의 무지함을 실로 느끼는 시간이었다. 내일은 미국 본토인 보스턴으로 이동하기 때문에 단장 조평세 박사가 진행하는 일정 브리핑의 이야기를 이어가며 하와이의 마지막 밤을 보내기로 했다.일반 한국인들이 즐겨 찾는 하와이하면 낭만적이고 신혼여행지로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곳곳을 탐방하고 보니 하와이는 눈물의 섬, 희생과 회복으로 다져진 역사의 상징을 담고 있었다. 기회가 된다면 충분한 시간을 두고 우리나라와 관계가 있는 역사의 흔적들을 다시 한 번 밟아 보고 싶다.   ‘리틀 이승만’ 최성민미국역사탐방 2024 견미단원Young Conservative Leadership Tour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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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계뉴스] [최선 칼럼] ‘견미단’이 만난 아름다운 사람들 미주교회신보2024.07.28
    [2024 '견미단' 미국 역사탐방 하와이 사진제공 최성민]  유난히 비가 많았던 겨울이 지나 봄내 음 가득할 무렵에 지인의 소개로 ‘견미단’을 접하게 되었다. 자유민주주의 보수청년들을 교육하여 장차 리틀 이승만으로 세우는 목표를 가지고 있는 조평세 박사와의 만남은 특별한 섭리로 다가왔다.2024 견미단은 1776년 미국의 독립정신을 배우고 1948년 대한민국 건국정신을 함양하는 목표를 두고 있다. 자유민주주의가 꽃피운 미국을 바로 알아보고 140년 전에 ‘보빙사절단’의 걸음들을 체험하기 위하여 역사 탐방을 다녀왔다.독립 전후로 크게 영향을 받았던 미국에서 우남 이승만 박사의 독립외교와 역사의 흔적을 밟아가며 기독교 정신에 입각한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대한민국 건국의 뿌리를 이해할 수 있었다.필자가 참석을 하고 싶었지만 사실 불가능한 것이었기에 아들에게 ‘견미단’을 소개해주었다. 아래의 글은 2주간의 역사 탐방 후 하와이에서 느낀 아들의 탐방 단상을 옮긴다.나의 ‘견미단’ 활동은 6월 29일 오후 4시 빌드업 클럽 세미나에서 시작되었다. “서울대학교 출신 과학자가 말해주는 PC주의의 허울”이라는 제목으로 김민아 대표와 조평세 박사 그리고 손영광 교수, 책 읽는 사자의 강사들에게 세미나를 들었다.북한인권의 대한 기초기식과 과학적 지식이 부족했던 나는 이번 세미나를 통해 견미단 일정을 시작하기 전 북한과 중국동포들을 어떻게 바라보아야하고 PC주의자가 무엇이며 우리가 지금까지 잘못 받아드리고 있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배우고 느끼는 2시간 30분의 시간이었다.Young Conservative Leadership Tour를 참석하기 1주일 전 단장과 부단장을 중심으로 견미단의 시작을 알리고 후원을 지원받고자 ‘연세대학교이승만연구원’이 주최한 “대한민국의 발전과 건국전쟁”과 사단법인 ‘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에서 주최한 “한미우남포럼 이승만과 대한민국”에 참석하게 되었다.양준모 연세대학교 이승만 연구원장을 시작으로 이각범 대한불교진흥원 이사장과 이석복 대불총 대표가 ‘대한민국 발전과 불교계의 역할’에 대한 강의를 하였다. 개인적으로 이승만 박사는 기독교인으로써 기독교에 대한 이야기만 알고 있었는데 이번 시간으로 이승만 박사가 종교의 자유를 위해 많은 헌신이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불교계에 끼친 영향과 불교계의 대한 오해, 국민의 대한 사랑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또한 데이비드 위스콘신대학교 교수와 김영기 조지 워싱턴 대학교 박사, 최불암 배우 등 많은 분들이 포럼에서 ‘자유민주주의 뿌리’, ‘농지개혁의 혁명’, ‘교육으로 깨어난 한국인’, ‘해방공간의 승리’, 선교사들의 헌신이라는 다양한 시선으로 바라보는 이승만 박사에 대한 이야기와 지식을 접할 수 있었다.7월 6일 배재학당역사박물관에서 2024 견미단 발대식으로 활동이 시작되었음을 알렸다. 한서영 홀리원코리아 대표의 ‘조선 개화와 정동, 그리고 이승만’ 이라는 제목으로 특강이 있었다. 역사를 좋아하고 근현대사의 지식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 특강을 통해 역사를 바로 알지 못했음을 깨닫고 새롭게 배우는 마음으로 우리나라의 역사를 다시 공부하게 되었다.조평세 박사의 O.T 설명으로 배제학당역사박물관을 관람하고 아펜젤러의 대한 역사를 배워나갔다. 총 54명의 견미단원은 9조로 편성되어 조별활동을 중심으로 진행하였다. 견미단 활동에 있어 ‘이승만대통령기념재단’의 후원 및 사업에 대한 목적을 알기 위해 방문했다. 후에 덕수궁 안에 있는 돈덕전을 견학하며 한국투어를 시작했다.7월 14일 각자 섬기는 교회에서 예배를 마친 늦은 오후 공항으로 마중 나온 가족들과 작별한 견미단원들이 인천공항에 모여 출국준비를 서둘렀다. 그런데 첫날부터 작은 그러나 땀나는 에피소드가 발생하였다. 한 조가 탑승시간을 착각하는 통해 마치 ‘나 홀로 집에’서 가족들이 비행기를 탑승하기 위해 달렸던 장면과 흡사하게 출국심사가 끝나자마자 400m 달리기를 시작하였다. 100m마다 지상승무원들이 달려와 신분을 확인하고 같이 달렸다. 불과 1-2분만 늦었어도 비행기 탑승이 안 될 뻔 했던 아찔한 상황이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탑승이 허용되었다.정말로 마음이 졸였지만 잠시나마 짜릿했고 단장과 견미단원들에게 미안함을 글로 표현한다.9시간 45분이라는 긴 비행 후 목적지인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14일 주일 밤에 출발하였는데 목적지에 도착하니 다시 14일 주일 아침이라는 신기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도착 후 버스에 탑승한 일행은 점심을 먹기 위해 알라모아나 해변으로 이동하였다. 관광버스는 우리나라와 다르게 바퀴가 6개로 구성되어있고 길었다. 버스를 기다리는 동안 공항을 지나는 차량들을 보니 도요타와 포드 브랜드가 많이 보였다. 픽업트럭이 많이 보였지만 생각보다 승용차와 세단 차량도 많이 보였는데 현대차와 기아차도 1분에 한 대 꼴로 보여서 신기했다. 공항셔틀버스와 시내버스도 돌아다녔는데 우리나라 버스와 다르게 버스 두 대가 전철처럼 붙어 있었다.알라모아나 해변에 도착한 일행은 도시락을 기다리며 계획하시는 하나님을 느끼게 되었다. 그늘 아래 자리 잡은 곳 바로 옆에 마침 전 한인기독교회 양효직 목사와 에드먼드 황(전 하와이 동지회 회장)등이 야외예배를 드리기 위해 나와 있었는데 견미단을 알아보시고 식사와 간식으로 섬겨주셨다. 그들은 일 년에 한 번 야외예배를 드리는데 매년 8월에 드렸던 예배를 금년에는 특별히 7월에 드리게 되었는데 마침 ‘견미단’을 만났다고 하니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참으로 오묘하다. 견미단 일정에는 없었지만 짦게나마 직접 느끼신 에드먼드 황의 이승만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해변 주변에는 대한민국에서 볼 수 없는 크기의 나무들이 가득했다. 특히 뿌리가 위에서 아래로 생기는 나무가 제일 신기했다. 식사를 마치고 한인기독교회를 방문했다. 광화문 모양을 하고 있는 교회 입구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그곳에는 이승만 박사의 동상과 옛 한인기독교회의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거미줄과 부식된 외형에 많은 안타까움을 느꼈다. 이후 오아후 공동묘지에 방문하게 되었다. 이곳에는 이승만 대통령의 수양 딸 김노디와 민찬호 목사 등 900여명의 이민자들이 있는 공간이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만 보았던 공동묘지를 방문하면서 너무나 많은 이들이 어려운 환경 속에 독립운동을 했다고 생각하니 그 분들에게 감사했고 또 큰 감동이 되었다.하와이 일정을 하는 2박 3일 동안에 낮에는 이승만 박사의 행적을 밟았고 늦은 저녁에는 작은 다과회와 KHHC의 만남, 오리엔테이션, 세미나가 있었다. 이번 역사탐방을 통해 한미동맹의 소중함과 나라와 민족을 향한 동포들의 애국심에 큰 감동을 받았다.우리의 조국 대한민국은 2차 세계대전 후 200개국의 신생 독립국가 중에서 유일하게 경제와 국방 그리고 자유를 꽃피운 국가이다. 얼마나 자랑스러운 민족인가! 지금은 분단이 되어 갈 수 없지만 반드시 북한의 문은 열린 것이다. 남북통일을 준비하고 세계 열방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강국으로서 한국교회는 세워질 것이다. 바로 그 때 준비된 국가의 지도자이자 통일한국을 섬기게 될 자로 ‘견미단’의 모든 대원들이 크게 쓰임 받게 되기를 기대한다.최선 박사(Ph.D., Th.D.)세계로부천교회 위임목사삼백만부흥운동본부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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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주교계뉴스] Daniel Yoo 목사의 따뜻한 섬김 미주교회신보2024.07.26
     [미국 L.A. 한인타운 거리에서 노숙인에게 커피와 용돈을 전달하는 Daniel Yoo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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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계뉴스] [최선 박사 칼럼] 건강한 가족의 삶을 기대하며 미주교회신보2024.07.23
    [삼백만부흥운동본부 총재 최선 박사]사람마다 생활 방식이 다르다. 각자 소유하려는 욕망도 다르다. 그리고 무엇을 위하여 살려하는 목적도 다르다. 자신의 허물과 실수투성이를 속죄하려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내가 잘 못 살아 왔다는 반증이다.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어가며 성숙해지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젊음으로 혈기왕성했던 시절, 환경적인 힘이 있던 그 때에 가족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행동들을 후회한다.80대인 김씨 영감님은 가정을 이루고 아들, 딸과 행복하게 살고 있었다. 부부의 사랑에 자녀들은 누구보다 자신감을 갖고 학교생활을 했으며 친구 관계도 좋았다. 그러던 어느 날부터 그가 술 마시는 날이 잦아지기 시작하였다. 해가 바뀌어 갈수록 중독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본인만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가족들은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리면서 급기야 최악의 지경까지 이르렀다.더 이상 함께 살 수 없다는 가족들의 절박한 요구에 그는 할 수 없이 집을 나와 홀로 살게 되었다.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며 노숙생활로 힘겹게 살고 있었다. 먹는 것이 부실한 가운데서도 계속적인 음주 때문에 육체적인 질병까지 들어 홀로 견디기가 어렵게 되었다.그는 동사무소와 지역사회 사람들의 도움으로 쉼터까지 오게 되었다. 자신의 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느낌에 늦게라도 용서를 구하기 위해 간절하게 가족들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러나 아내와 자녀들은 그를 거부하였다. 그는 끝내 가족들을 만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유가족들이 장례식장에서 고인을 만나게 된 슬픈 사연은 이 시대의 자아상을 보여준 사례이기도 하다.또 다른 70대 박씨 어르신은 위의 사연과는 반대의 아픈 생활을 하다가 쉼터로 들어 왔다. 가족들은 박씨 어르신을 만나길 원하지만 정작 본인이 만나기를 거부하면서 마지막 생을 달리 하셨던 사례이다. 가족들에게 너무나 미안해했던 그는 끝내 마지막 인사까지도 거부하며 홀로 세상을 작별하는 선택을 한 것이다.여전히 누군가는 가족들 때문에 힘들어 하여 세상을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잊지 못하는 상처를 가지고 산다는 것은 비극인 것이다. 쉽지는 않겠지만 자신의 욕심을 절제하고 유흥과 쾌락에서 빠르게 벗어나도록 노력해야 한다. 반드시 이 어두운 터널에서 탈출해야만 한다. 나로 인해 나의 가족들이 말할 수 없는 고통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가정은 너무나 소중하다. 부부와 자녀들이 지지와 사랑 안에서 건강한 가정을 가꾸는 것은 중요하다.오늘은 아픔과 기쁨을 함께하는 쉼터에서 예수 그리스도 생명의 말씀을 선포했다. 과거의 다양한 아픔과 사건으로 인하여 가족들과 함께 하지 못하는 소외된 이웃들에게 사랑으로 보듬고 내일을 향한 행복의 메시지로 소망을 찾는 시간들이었다.그곳은 노숙인, 출소인, 장애인, 노인 등 우리의 소외된 이웃을 섬기고자 38년 전에 설립된 자활 시설 공동체이다. 쉼터 가족들에게 재활교육을 통하여 자립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주며 천국의 소망과 비전을 깨닫게 하는 귀한 곳이다. 새로운 삶의 의지를 다지는 그들과 함께 하나님을 예배하는 행복한 시간이었다.우리나라의 인구는 절벽이라고 할 만큼 급격하게 감소하고 있다. 저출산이 계속되는 상황에서 가족이라는 가치가 더욱 귀해진다. 우리 사회가 근간을 이루는 가족을 더 귀히 여기어야겠다. 자신의 실수로 가정을 훼손하고 말년에 홀로 세상을 떠나야만 하는 슬픈 현실은 없어야 하겠다. 물론 우리사회에는 끈끈한 사랑으로 행복한 가정들이 많다. 그런데 물질과 명예 그리고 소유가 많다고 해서 가족들이 행복한 것이 아니다. 물론 가진 것이 많다면 삶은 풍족해질 것이다. 그러나 가정 안에 폭력과 돌이킬 수 없는 허물과 실수가 계속적으로 쌓인다면 가족의 평화는 깨지고 말 것이다.그러므로 대한민국 사회 곳곳에 곰팡이처럼 음지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이웃들을 찾아 보듬어 주고 심신이 건강한 삶을 영위할 수 있도록 국민 모두가 의지를 가지고 돌아보자. 그리고 소중한 가족들에게 말과 행동으로 사랑을 나타내자. 가족들이야말로 인생 마지막까지 함께 할 동반자임을 기억하면서 멋진 삶을 살아가자.   최선 박사(Ph.D., Th.D.)세계로부천교회 위임목사삼백만부흥운동본부 총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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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계뉴스] [최선 인터뷰] 튀르키예 선교사 진요한, 강인애의 사랑 실천 미주교회신보2024.07.19
     [사진제공 강인애 선교사 튀르키예에서 선교사역 활동]미국 LA에서 2024 KWMC주최로 7월 8일부터 11일까지 제10차 세계한인선교대회가 있었다. 2,000여명의 각국 선교사와 미국한인교회 목회자, 평신도 MK, PK 중심의 젊은 리더들이 참석한 가운데 성황리에 마무리되었다.4년마다 열리는 선교대회는 남가주사랑의 교회에서 “예수, 구원의 그 이름”(Jesus No Other Name!, 행 4:12) 이라는 주제로 진행되었다. 세대를 불문한 참가자들이 선교의 열정을 불태웠다.2023년 2월, 튀르키예에 84년 만에 최대 규모의 지진이 발생하였다. 튀르키예 동남부 가지안테프 인근을 강타한 모멘트 규모 7.8의 대 지진은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던 이른 새벽시간에 발생했기에 주민들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이 지역은 초대교회의 안디옥으로 미주대한신학대학교 이사장 류당열 박사는 진요한, 강인애 선교사와 함께 지진 피해지역을 방문하였다.튀르키예(터키)에서 생명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 선교사와 통신으로 인터뷰를 진행하였다. <편집자 주>   Q: 주님 안에서 평안하신지요? 인터뷰에 응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교사역과 자신을 소개해 주세요.A: 진요한 선교사-저는 1999년 8월에 있었던 7.8~7.9도의 대지진을 겪었습니다. 이곳에서도 7.8의 대지진을 겪으며 두려웠지만 그러나 주님의 역사하심도 체험하였기에 복음을 위해 활발하게 활동 할 수 있었습니다. 튀르키예에서 어느덧 26년째 도장을 열고 태권도와 합기도를 통하여 원주민들에게 선교하고 있습니다.아울러 한방 의료선교와 도장에서 주일예배를 드리며 사역 해왔습니다. 2년 전부터는 현지인교회 목사님과 협력사역을 하고 있으며 일대일 관계전도에 더욱 많은 시간을 할애 하고 있습니다.Q: 어떠한 방법으로 복음을 전하고 있는지 말씀해 주세요?A: 강인애 선교사-저는 교회에 소속으로 현지인 목사님을 돕는 협력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매주 월요일에는 도장에 나오는 학생들의 어머니들과 영어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복음을 나누고 있으며, 매주 목요일에는 교회성도들에게 일대일 제자훈련과정을 가르치는 제자양육 반을 섬기고 있습니다.그리고 여성 선교사님들과 함께 영어로 복음전하기 그룹을 만들어 매주 금요일마다 영어의 진보를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지진 지역에도 그룹을 만들어 함께 섬기러 다녀오지만 거리상 멀어서 이 부분이 약간의 어려움이 있습니다.Q: 튀르키예 국가와 대한민국과의 역사적인 관계를 말씀해 주신다면?A: 튀르키예는 옛날 돌궐족의 후예들로서 우리조상 고구려와도 교류하며 중국의 수나라를 견제하기 위해 군사동맹을 맺었던 나라입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우랄알타이 산맥을 근간으로 살아가던 우리 조상들과 만나게 됩니다. 즉 민족적으로 형제인 셈입니다.그들은 1950. 6. 25한국전쟁에도 미국 다음으로 많은 전투병들을 보내줌으로 인해 대한민국의 자유를 지켜주었던 형제 국가입니다. 오늘날도 그들은 변함없이 UN에서 일어나는 모든 결의에서 대한민국을 적극 지지하는 나라입니다.Q: 튀르키예 선교지로 지원하여 선택하게 된 동기는 무엇일까요?A: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동안 살아오면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기도하는 중에 오직 주님께서는 튀르키예 선교방향만 남긴 채 우리들의 모든 삶의 길을 막으셨습니다. 이방인의 나라이지만 초대교회가 형성 되었던 곳입니다. 이곳에 와서 보니 살아계신 주님의 인도하심이 얼마나 정교하게 저희 부부의 삶을 이끄시는지 알게 되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Q: 튀르키예 가장 큰 피해를 다녀 본 지역은 어디 인가요?A: 가장 피해가 심했던 지역 중 하나인 이스캔데룬이라는 지역입니다. 그곳에는 여름과 겨울을 견디도록 만들어진 컨테이너 하우스로 제작된 한국 마을이 세워져 있습니다. 피해를 많이 당한 분들에게 분양되었습니다. 이곳에도 지속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Q: 미주대한신학대학교 이사장 류당열 박사님과 의료팀 사역을 말씀해 주세요?A: 저희 부부는 류당열(Daniel You)목사님과 함께 튀르키예 지진지역을 방문하였습니다. 집들과 건물 대부분이 무너져 내린 수리아 안디옥이 있었던 하타이(Hatay) 지역입니다. 그곳에서 1일 최대 3,000명에게 식사와 물을 제공하는 사역에 동참하여 섬기게 되었습니다.두 달 후 2차로 오신 미주지역 의료선교팀(팀장: 김인철 목사)의 방문으로 다시 한 번 강진으로 인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던 이재민들을 섬겼습니다. 그 후로도 비정기적으로 방문하고 있습니다.Q: 마지막으로 선교사역 중에 가장 시급한 기도제목을 나누어 주신다면?A: 튀르키예 지진지역이 재건되려면 아마도 빠르면 10년 늦으면 20여년 이상 걸 릴 것으로 예상합니다. 저희는 현재까지 지하에서 태권도 도장을 운영해왔습니다. 하지만 습기와 각종 해충으로 인해 환경적으로 불리한 조건에 있습니다.간절한 소원이 있다면 현재 선교센터로 사용되어지고 있는 태권도 도장이 이전하는 것입니다. 새롭게 마련하는 것이 일차적인 목표입니다. 건물이 곧 재건축을 진행할 것 같은데 그전에 이전을 하길 원합니다. 장기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 있는 태권도 사범이나 영어교사 등 동역자로 젊은 선교 헌신자들이 오시면 더욱 활력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그리고 이 사역이 주님의 뜻이라면 반드시 이루리라 믿으며 기도하는 중에 있습니다. 튀르키예 국가 선교를 위하여 많은 관심을 주시고 국내외 한인들의 적극적인 기도의 후원을 바랍니다.   열악한 선교지에서 현지인들에게 길과 진리, 생명의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는 진요한, 강인애 선교사를 응원하고 기도한다. 선교는 사랑 실천이다. 그 사역이 주님 오시는 그 날까지 지속되기를 기대한다.   최선 박사(Ph.D., Th.D.)세계로부천교회 위임목사삼백만부흥운동본부 총재FEBC극동방송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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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교계뉴스] [최선 박사 칼럼] 스위스 제네바 종교개혁자들을 찾아서 미주교회신보2024.07.17
    종교개혁사를 공부하는 동안 몇 차례에 걸쳐 스위스와 서유럽을 탐방할 기회가 있었다. 특히 16세기 스위스의 제네바, 취리히, 바젤은 프랑스 위그노들이 가톨릭으로부터 정치적, 종교적 억압으로 고통을 겪었다. 종교개혁의 중심지였던 스위스로 프로테스탄트 피난민들과 종교개혁자들이 각국에서 들어오고 있었다. 생명의 진리를 위하여 많은 피를 흘린 그들의 불꽃같은 희생의 정신을 돌아보며 혼란한 시대에 신앙의 교훈을 삼고자한다. 16세기의 유럽은 기독교 천 년 가까운 세월 동안 다양한 발전도 있었다. 그러나 종교적인 박해와 반성경적인 제도로 성경의 기본적인 진리에서 벗어나 성도들에게 큰 아픔을 가져다주었다. 가톨릭의 극심한 물질적, 윤리적 타락에 맞서서 종교개혁의 등불을 든 종교개혁자들은 하나님의 거룩한 뜻을 이루기 위해 성경과 믿음을 강조하며 등장하게 되었다.본 글에서는 스위스 제네바 종교개혁자들을 찾아서 종교개혁의 정신적 교훈을 살펴보고자 한다.프랑스 출신이며 개혁교회의 기초를 닦은 존 칼빈이 종교개혁의 선두주자로 등장하게 되었다. 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의 영향은 스위스와 프랑스가 바른 교회 개혁을 위한 열매를 맺게 되었다. 프랑스 국왕이 위그노들을 박해하자 칼빈은 개신교 도시였던 스위스 제네바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기욤 파렐의 강력한 요청으로 스위스 종교개혁 운동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게 되었다.존 칼빈은 종교개혁 2세대로 마틴 루터의 개혁정신을 계승하여 발전시켰다. 독일의 루터파는 그리스도 중심으로 이신득의 원칙을 매우 중시했다. 그리고 교회와 국가에 복종하며 가톨릭적이며 신학적인 요소를 유연하게 수용하였다.마틴 루터가 온건적 개혁주의였다면, 존 칼빈은 하나님 절대중심으로 절대주권과 원칙을 중시하며 국가와 교회분리를 주장했다. 그는 보다 혁신적이며 엄격한 개혁주의로 경건하고 강력한 신앙을 강조하였음을 인식할 수 있다.심지어 존 칼빈은 십자가 위에 예수의 형상을 달지 못하게 할 정도로 우상숭배에 대하여 매우 엄격했다. 그는 미사를 예배와 설교로 바꾸었다. 칼빈의 영향을 받은 스코틀랜드 출신 존 낙스는 본국으로 돌아가 장로교 목사, 장로, 집사, 교사로 구성된 교회 직제의 기초를 세우며 장로교를 발전시켰다.루터가 주장한 종교개혁의 기본 원칙은 오직 믿음(Sola Fide), 오직 은혜, 오직 성경이었다. 칼빈에 의해서 오직 그리스도, 오직 하나님께 영광이 합쳐져서 이른바 종교개혁의 5대 강령이 완성이 되었다.칼빈의 종교개혁 동료였던 기욤 파렐(Guillaume Farel, 1489-1565)은 칼빈보다 먼저 프랑스에서 추방을 당하였다. 그는 스위스에서 활동했던 순회 선교사이자 위그노 종교개혁자로 스위스 베른과 제네바를 종교개혁 도시로 만드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그리고 칼빈이 제네바에서 활동하도록 주선하였고 개혁교회 설교자로 활동 하였다.칼빈의 후계자였던 테오도르 베자(Theodor Beza, 1519-1605)는 법률학도로서 1548년 심한 질병 후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였다. 또한 베자는 제네바와 로잔에서 그리스어를 강의하였고 칼빈이 설립한 제네바 아카데미의 원장이 되었다.그는 프로테스탄트 개혁파를 옹호하였고 제네바 종교지도자인 칼빈의 후계자로서 베자 사본을 정리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4세기 말 고대 사본으로 1562년 1차 프랑스 종교전쟁 중에 리용이 약탈되던 중에 베자에게 인계되었고 1581년 캠브리지대학교 도서관에 기증되었다. 베자는 피난과 신앙의 자유를 위하여 고통 받았던 프랑스 위그노들의 자문역할을 훌륭하게 담당하였다.존 낙스(John Knox, 1514-1572)는 16세기 영국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자로 칼빈의 스코틀랜드교회의 창시자이며 장로교의 선구자였다. 그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사제였지만 제네바에서 칼빈과 교류하면서 개혁주의 교회 확립을 위해 노력했다.존 낙스는 1561년 프랑스에서 귀국한 로마 가톨릭 신자인 여왕 메리스튜어트 1세가 교황 정치로의 회복 시도와 개혁주의 종교개혁을 방해하자 메리 1세를 비난하였다. 그리고 개혁주의 도입을 강력하게 촉구하였다. 1567년 여왕이 퇴위하고 그 아들 제임스 6세가 프로테스탄트 왕으로 즉위함으로서 존 낙스의 종교개혁이 스코틀랜드에서는 크게 인정받게 되었다.중세시대는 점점 종교가 타락해 오히려 반성경적이었으며 평신도는 성경을 읽을 수도 없는 시대였다. 성직자들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 하고 있었다. 종교개혁은 성경이 주장하는 원래의 복음적인 교회로 돌아가자는 신앙운동이었다. 본질과 멀어진 것들을 혁신적으로 개혁하고 수정하자는 개혁정신을 담고 있었다. 교황 중심 주의적인 권위와 인본주의적 발상으로부터 첨가 되고 오염된 의식 등을 제거하고 오직 믿음중심, 성경중심, 은혜중심, 예수중심의 신앙본질로 돌아가는데 오랫동안 피 흘림과 희생이 있었다는 역사적인 사실에 마음이 아프다.우리는 가식적인 종교의식과 하나님과의 영적 교통과 기쁨이 없는 신앙행위를 경계하여야 하겠다. 오늘은 스위스 제네바 종교개혁자들을 살펴보았다. 한국교회가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신앙의 본질로 돌아가 기독교 정신이 사회를 정화하고 섬기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국교회가 오직 생명의 복음을 전하며 크리스천들이 믿음과 삶의 실천을 통해 향기롭고 아름다운 열매가 풍성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최선 박사(Ph.D., Th.D.)세계로부천교회 위임목사삼백만부흥운동본부 총재[삼백만부흥운동본부 총재 최선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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